발표된 수필

고양이처럼 출근하기

칡뫼 2015. 3. 24. 06:21

 

 

 

 

 

 

 

 

                          고양이처럼 출근하기                       

                                                                                                        김형구

 

   새벽 5시, 살그머니 일어나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간다. 길 건너 교회 LED불빛이 차갑게 마루를 비춘다. 스위치를 켜자 천장에 매달린 둥근 한지 등이 몽롱하게 깨어난다. 바깥 날씨가 무척 차가운가 보다. 불빛이 잔뜩 움츠리고 있다.

 

  부엌은 늘 정갈하다. 잘 짜놓은 하얀 행주,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국 냄비와 찌개그릇, 식기건조대에 가지런히 담겨있는 말끔한 접시와 사발들이 불빛에 반짝인다. 몇 해 전부터 잘 닫히지 않는 싱크대 문짝 하나만 반듯하게 잘린 투명테이프가 붙들고 있다. 마치 허술한 나를 붙잡고 있는 아내처럼.

 

  밥솥에 쌀을 앉힌다. 어제 아내가 씻어 놓은 쌀이다. 흰 쌀 위에 서리태. 흑진주처럼 윤이 난다. 전기코드를 꽂고 밥솥 스위치를 누른다. 세면을 하고 주방으로 돌아오면 여지없이 밥솥 스위치가 ‘탁’ 소리를 내며 튕겨 오른다. 빤히 알면서도 매번 놀란다. 이때쯤이면 한지 등도 화색이 돈다. 뜸 드는 틈을 이용해 소리 나지 않게 상을 차린다. 아내가 정성스레 만들어 놓은 찬이다. 밥솥을 연다. 구수한 밥 냄새. 고향 냄새다. 밥을 푼다. 어머니도 아내도 이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가족의 입에 들어갈 밥은 사랑이다. 밥주걱으로 밥을 쓰다듬으며 사랑을 담는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찬그릇은 냉장고에, 찌개그릇은 렌지 위에, 빈 그릇은 개수대에 살며시 넣고 출근을 서두른다.

 

  언제부터일까. 새벽밥을 차려 먹은 것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자 나 홀로 새벽출근을 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쯤 내가 우겨서 시작한 것이지 싶다. 아내는 시집와서 늘 새벽밥을 차렸다. 잠이 많았던 나는 새벽에 일어나 밥 차리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애들도 점심이건 저녁이건 즉시 지은 밥을 챙겨 먹였다. 전기밥솥을 사다 줬지만 예약취사나 보온을 거의 쓰지 않았다. 절밥처럼 알맞게 지어서 깨끗이 비웠다. 한꺼번에 해놓은 밥은 보온이 되어 있어도 밥 기운이 사라진다는 지론이었다. 그래서일까 밥을 잘 먹여주었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병치레가 거의 없었다.

 

  살림이 넉넉한 적이 없었다. 가슴이 늘 미안한 마음으로 소금가마처럼 젖어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딴에는 아내를 위한다며 새벽밥을 차려 먹는 것이다. 반대를 하던 아내는 결국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다고 편히 잠을 자기나 할까? 누워 있어도 함께 깨어난 것을. 하지만 난 이 생활이 좋다. 다른 것은 못해줘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못이기는 척 남편의 작은 자존심을 세워주는 아내가 고맙다.

 

 문을 살며시 열고 고양이처럼 집을 나선다. 이 시간의 새벽 공기는 늘 상쾌하다. 내 기분도 상쾌하다.

 

                       <2015 에세이피아 여름호>

 


새벽출근을 하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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