쓱 SSG
칡뫼 김형구
얼마 전 티브이에서 이색적인 광고를 보았다.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 영어 잘하는데 SSG를 어떻게 읽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남편이 한 마디로 ‘쓱’하고 차갑게 대답하는 장면이었다. 모 쇼핑몰 선전이었는데 ‘쓱’ 뭐든지 쉽게 살 수 있고 배달도 ‘쓱’ 편하게 해준다는 것이 주제였다.
‘쓱‘은 국어사전에 보면 넌지시 말을 건네거나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슬쩍 문지르거나 비비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또는 그 소리를 나타내는 말. 척 내닫아 나서거나 빨리 지나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등으로 설명해 놓았다 즉 ‘쓱’이란 말에는 넌지시, 슬쩍, 척이란 분위기가 내포되어 있다. 뭐든 적당히 편하게 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풍긴다.
그림을 그리다 체력이 달리거나 진도가 부진할 때 쓱 그리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싶은 그 어떤 미완의 대상들은 머릿속에 쇠파리처럼 윙윙거릴 때가 많은데 눈앞에 드러나는 작품은 1년에 몇 점 안되니 말이다. 더군다나 점으로 작업을 하는 나로서는 면을 큰 붓으로 발라 질감을 나타내거나 선묘로 쉽게 정리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세상에 녹녹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표현하는데 점만 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점으로 하는 작업을 포기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점은 혼자서는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지만 서로 연대하면 전깃줄도 되고 벽도 된다. 벽돌 쌓듯 하나하나 축적해야 모습이 나오고 질감도 드러나며 구성 또한 단단해진다. 그런데다 아무리 어둡고 슬픈 장면도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치환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 점이 내가 점을 고집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다 세월이 한 없이 소요될 때는 슬며시 “쓱” 하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성 없이 흩뿌리듯 무심한 점에서는 깊은 그 느낌이 안 나왔다. 손끝에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탄생된 점만이 화폭을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이었다.
‘쓱’사고 ‘쓱’받은 물건에 과연 얼마나 정이 갈까. 버리기도 쉽고 잊히기도 쉬운 물건일 것이다. 또 쉽게 ‘쓱’사면 되니 말이다. 간절히 원하고 푼돈을 모아 밤잠을 설치며 장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려 산 누님의 꽃신만큼 좋을까.
그림도 그와 같지 싶다. 고민 없이 뭐든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쓱'그린 것은 영락없이 감동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쉽고 편한 세상이지만 ‘쓱’으로 안 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이 순간 그 사실이 참으로 고맙다.
2016년 창작산맥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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