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들의 대화
김 형 구
몇 년째 일까. 틈만 나면 밤에 골목길을 찾아다녔다. 그림 소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현동, 공덕동, 만리동. 옛 모습을 지닌 집들이 많아 정겨운데다 산동네여서 수직구도의 그림을 그리기에도 좋았다. 특히 소시민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소시민의 삶에는 가식이 없다. 솔직한 모습은 아름답고 때론 슬프다. 그래서일까. 그림으로 세상에 질문을 던져온 나는 그곳에서 답을 얻고 싶었다.
부산한 낮에 비해 조용한 밤 골목은 도리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이든 사람의 뒷모습 같은. 벽에 세워진 낡은 리어카나 등받이가 유난히 높은 오토바이, 복잡한 전선을 걸머지고 있는 전봇대는 이상하게도 어둠속에서 더 도드라져 보였다. 벽에 붙어있는 광고물이며 비탈길에 세워진 자동차, 금이 간 보도블록도 가로등 불빛아래서는 주인공이 되곤 했다
아현동을 찾았던 때의 일이다. 시장에서 순댓국을 배불리 먹은 탓인지 가파른 골목길이 다른 때보다 힘들게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왔던 길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언덕길을 올려다보기도 하는 나를 어떤 소년이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놀란 토끼마냥 계단을 뛰어 언덕너머로 사라졌다. 밤이 깊어 하늘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소년이 사라진 곳으로 올라갔다. 숨이 찼다. 좁고 경사가 심해 차는커녕 오토바이도 오르기 힘든 곳이었다. 그 아이는 이런 곳을 매일 오르내렸을 것이다.
올라서니 산꼭대기였다. 발그스름한 나트륨 가로등불이 홀로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나무도 없고 허름한 지붕들 위로 우뚝 솟구친 연탄가스 배출구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지만 한편 가장 낮은 곳이기도 했다. 집들이 따개비마냥 붙어있는 또 다른 달동네가 눈앞에 바위섬처럼 솟아 있었다. 멀리 빌딩숲이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진 듯 세상은 희고 노랗고 푸른 불빛들로 가득했다.
내려가는 길에 처마를 마주한 두 채의 집과 마주쳤다. 기와와 루핑을 인 야트막한 지붕. 벽은 깔끔했고 창틀도 꼼꼼하게 하늘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그때 내 눈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두 집 대문 앞에 놓인 빈 의자들이었다. 하나는 등받이가 달린 녹슨 철제의자로 푸른 방석이 깔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등받이와 팔걸이가 하나로 이어진 빨간 플라스틱 의자였다. 의자 하나는 비스듬히 벽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마치 일을 끝내고 돌아서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갑자기 그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낮에 나와 앉았을 사람이라면 노인이지 싶었다. 어쩐지 안노인들이었을 것 같았다. 헐렁한 바지, 빛바랜 분홍색 털스웨터, 희끗한 짧은 파마머리에 주름진 얼굴. 등은 굽었지만 왠지 꼬장꼬장할 것 같은. 멀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두 분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고향이야기였을까, 먼저 간 남편 이야기였을까, 어쩌면 손주 자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무릎 위에는 아마도 부업거리가 놓여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자니 두 개의 의자가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갑자기 그 의자들을 그리고 싶었다. 아니, 그 이야기들을 담고 싶었다. 손이 바빠졌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스케치하고 종이 위에 의자를 훔치듯 옮겨 놓았다. 느낌을 메모하고 간단히 사진도 한 장 박았다.
내려오는데 등 뒤에서 의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저 젊은이는 우리 동네 사람도 아닌데 밤에 여긴 뭣 하러 왔지.”
“누굴 찾아 왔남, 사진도 찍고 종이에 뭘 적던데. 철거반원인가?”
나는 모른 체하고 서둘러 길을 내려왔다.
‘두 개의 빈 의자가 있는 풍경’이란 그림이 그려졌다.
돈 많은 사업가가 뇌물수수죄로 잡혀가는 모습을 뉴스에서 보고 난 날, 의자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쯧쯧, 미련한 것 같으니. 다 쓸래도 못 쓰고 가는 게 돈이여.”
플라스틱 의자가 말문을 열자
“그러게 말여, 지고 갈 꺼여 메고 갈 꺼여.”
녹슨 철제의자가 말을 받았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에서, 손연재가 리듬체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봤제, 어쩜 그리도 예쁘다냐, 그런 손녀딸 하나 있었으면….”
“누가 아니랴 귀여 죽갔어.”
요양병원에 계신 집안 어른을 찾아뵙고 온 날이었다.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해 몇 년 째 누워계신 분인데 다녀올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날도 그림 속의 빨간 플라스틱의자가 말을 시작했다.
“난 말이여 딱 3일만 앓다 죽고 싶어. 그래야 멀리 있는 자식들 얼굴도 보고 할 말도 할 거 아녀.”
이 말에 다리를 저는 푸른 방석 녹슨 철제의자가 길게 한숨을 지었다.
“자식 얼굴 보면 머혀, 난 그냥 어느 날 자는 듯이 죽고 싶구먼.”
2013년 <에세이문학>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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