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날의 풍경화
김 형 구
주문했던 화선지를 찾으러 인사동에 갔다. 다락방에는 적잖은 화선지가 있었다. 물기를 잘 머금어 주는 오당지, 조금 얇은 옥당지, 얼룩덜룩 닥나무 껍질이 박혀있는 닥지, 질긴 순지. 하지만 100호 크기를 그릴만한 큰 종이는 없었다. 종이를 찾아들고 돌아오는 길, 마음은 벌써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학교 모습도 보이고 그 속에서 뛰어놀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쌀쌀한 봄날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코흘리개 입학생들이 빨강, 노랑, 파랑, 초록색 리본을 가슴에 달고 색 따라 줄을 서 있었다. 훌쩍 자란 자식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부모님. 단상 앞에 늘어선 선생님들. 교장선생님의 환영사가 있었지만 난 리본색깔이 어찌나 곱던지 그 색에 취해 있었다.
봄이면 학교 뒷산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었고 여름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하늘이 바다처럼 푸르던 날 열린 가을운동회는 동네잔치였다. 겨울이면 교실에는 주운 솔방울과 장작개비를 이용해 조개탄 난로를 피어놓았다. 하지만 교실이 좁은 아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밖으로 달려 나가 말뚝박기놀이를 하거나 고무줄놀이를 했다. 몇몇 아이들은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 따뜻한 햇볕을 쪼였다. 해가 고마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쨍한 햇살에 눈이 시려 찡그린 얼굴이 되곤 하였다. 미술시간이면 나는 나무, 산, 그리고 집을 그럴듯하게 그렸다. 언젠가 도화지에 우리 소 누렁이를 그렸는데 선생님은 칭찬하시며 교실 뒤에 붙여 주셨다.
학교에서 내려다보면 동쪽으로 나무전봇대가 길게 늘어선 신작로가 있었다. 버스가 지나가면 황토먼지가 풍선처럼 꼬리에 매달렸다. 이 모습이 신기해 차가 산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래선지 나는 가로수와 전봇대가 늘어선 신작로를 즐겨 그렸다. 그럴 때면 내 마음도 끝없이 길을 따라 가곤했다.
얼마 후 실제로 그런 일이 생겼다. 부모님의 교육열에 선생님의 추천으로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림 속의 길을 따라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학교친구들이 찾아와 부러움 반 아쉬움 반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내 생애 첫 번째 슬픈 이별이었다. 서울에 와서도 여전히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바라는 공부를 해야 했기에 그림은 항상 뒷전이었다.
나는 평소 그림을 호수로 나누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것 같아. 하지만 이번에는 가로 162센티 세로 112센티 풍경 100호로 그 크기를 따졌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화선지를 크기에 맞춰 접었다. 화선지를 자를 때는 가위보다 칼이 제격이다. 칼을 접힌 종이 사이에 넣고 조심스레 톱질하듯 움직였다. 종이는 소리 없이 잘렸다. 화선지를 화판에 고정하니 하얀 허공이 펼쳐졌다. 천천히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잡는 붓이었다.
어린 후배들이 볼 그림이니 쉽고 편안한 풍경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림 한가운데 꿈을 키워준 학교를 배치했다. 동네모습에 누구네 집은 있고 누구네 집은 없으면 안 되었다. 보이는 것은 모두 그려 넣었다. 멀리 보이는 문수산을 봄, 그 아래 솔산은 여름, 마을은 가을로, 그리고 화폭아래 앙상한 나무와 추수가 끝난 논밭을 늦가을과 겨울을 상징하듯 그려 넣었다.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일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큰 작품이기도 하였지만 아직 그림에만 몰두할 수가 없는 생활이었다. 퇴근 후 고작 한 두 시간 정도가 작업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을 시점으로 다시 붓을 잡기로 한 각오 때문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때면 꿈 많던 어린 시절이 자주 떠올랐다. 다시 힘이 솟았다. 순수한 동심이 나를 일으켜 세웠을까. 결국 이 작품을 계기로 생활고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세월을 딛고 재기할 수 있었다.
학교를 찾았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왁자지껄한 축제분위기였지만 개교 100주년 기념식 내내 내 눈은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내느라 바빴다. 목조건물은 시멘트 건물로 바뀌었고 커다랗게만 보였던 운동장은 세월에 닳고 닳은 듯 작아져 있었다. 사십 여년 세월을 어디에 감췄는지 서있는 느티나무만이 그대로였다.기념식이 끝나고 기증한 그림 앞에서 고향친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박수와 칭찬, 웃음 속에 친구가 한마디 했다.
“지각 잘했던 교문 앞 순주네도 저기 있고 아하 ! 우리 집도 있네! 예배당도 있고."
머리 희끗한 친구들이 다시 코흘리개가 되어 있었다.
<미래시학> 여름호
월곶초교개교100주년기념화 162cm x 112cm 화선지 수묵담채 2008년 칡뫼 김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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