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감추고 싶었던 것은 고추가 아니었어
김 형 구
내 백일 사진을 보았다. 고추를 내 놓은 채 웃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문수산 자락 시골학교에는 봄 햇살이 가득 차 있었다. 체육시간, 선생님의 호각소리에 맞춰 한 명씩 뜀틀을 뛰어넘었다. 이번에는 구르기였다. 선생님께서 동작을 도와주셨다. 내 차례였다. 떨렸지만 달려와 발을 굴렀다. 그런데 발이 머리 위로 솟구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잡아 넘겨주셨다. 순간 바지가 벗겨지고 말았다. 평소에도 고무줄이 헐렁해 잘 내려오던 바지였다. 잽싸게 바지춤을 올렸다. 아이들 웃음소리. 혜자, 영숙이도 봤을 텐데. 선생님의 너털웃음 소리. 잘 나가던 시골학교 반장의 수모였다.
삼촌이 장가를 갔다. 강화에서 시집온 작은어머니는 살결도 곱고 말씨도 사근사근했다. 향긋한 분 냄새. 예쁜 한복 위에 두른 행주치마는 쌀가루처럼 희고 고왔다. 나는 작은 엄마가 마냥 좋았다.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술래가 열까지 세는 동안 어디든 숨어야했다. 난 건택이네 뒷간으로 들어갔다. 컴컴하고 냄새가 났지만 참았다. 잿더미 뒤로 늘어진 가마니 자락. 그 뒤에 숨으면 못 찾을 듯싶었다. 가마니를 들추고 발을 디뎠는데 아뿔싸. 그곳은 똥통이었다. 나는 두발이 빠졌고 이내 울면서 기어 나왔다. 집으로 가는 동안 똥냄새는 울음소리를 타고 온 동네로 퍼져나갔다. 달려 나오신 어머니는 재빨리 나를 우물가로 데려갔다. 큐피드처럼 발가벗겨진 나를 씻겨준 것은 작은어머니였다. 코를 찡그렸지만 연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계셨다. 아이들은 담 위로 조롱박처럼 고개를 내밀고 키득거렸다. 창피했다.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작은엄마에게 고추를 보인 사실이었다.
서울로 전학을 했다.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께서 마련한 집은 동교동의 판잣집이었다. 루핑이나 함석 조각으로 된 지붕에는 돌이나 벽돌이 올려져있었다. 방 하나를 합판으로 막아 또 방을 만들었다. 비슷비슷한 집들 앞에는 기찻길이 있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면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흔들렸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바로 우리 집이었다.
가난 때문이었을까. 판자촌에서는 하루가 멀게 싸움이 일어나고 아이들 울음소리로 지새는 날이 많았다. 그때 마침 소란스럽게 기차가 지나가면 애기울음이 멎거나 부부싸움이 그치기도 했다.
서울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 부모님은 할머니 댁에 남아있던 동생들을 데려 오셨다. 함께 모인 가족은 행복했다. 창문에는 커튼도 쳐졌고 어머니 방에는 부업용 재봉틀도 있었다. 내 책상도 생겼다. 뒤 창문을 열면 구기자나무가 고향을 선물해줬다. 잿빛도시에 꾸린 우리만의 보금자리였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 왔는데 동네가 사라졌다. 동네가 폭격 맞은 것처럼 아수라장이었다. 놀란 나는 집으로 뛰어갔다. 우리 집도 없어졌다. 강제철거된 것이었다. 짐정리를 하시던 어머니는 나를 보자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다.
“네 책 챙겨놨는데 빠진 것 없나 봐라”
벽이 부서진 채 드러누워 있고 해머로 두드린 듯 구멍 난 합판, 그 위로 얼마 전 바른 분홍색벽지가 속살을 드러낸 채 찢겨져 있었다. 우리 식구만 볼 수 있었던 빨간 구기자 열매도 길에서 훤히 보였다. 재봉틀, 양은밥솥이며 책, 아끼던 크레파스도 나뒹굴고 있었다. 상 받은 경복궁 ‘향원정’ 그림에는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오늘 철거한다는 귀띔도 없었는데”
“그래도 내가 동네 반장이라고 우리 집 뒷담은 남겨 논거라.”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는 ‘ㄱ’자로 조금 남아있던 뒷담을 보고 애써 위로를 삼으시는 모양이었다. 남아있던 담을 이용해 임시로 방을 꾸몄다.
그날 밤 동네는 물속처럼 조용했다. 아이들도 울지 않았고 부부싸움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조용함이었다. 그런데 이상스레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 가족만의 비밀의 정원이 부서지고 강제로 벗겨진 서러움 때문일까. 그림에 찍힌 발자국 때문일까. 고추가 보여 진 때보다 더 속이 상하고 억울했다. 한동안 뒤척이던 나는 새벽기차가 소란스럽게 지나가고 나서야 잠이 들었지 싶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하게 동네는 다시 살아났다. 다시 시끄러워졌고 아이들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명랑해졌다.
백일사진을 다시 가만히 들여다본다. 고추를 내 놓고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다. 그래 내가 감추고 싶었던 것은 고추가 아니었어.
<수필과 비평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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