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뫼 2019. 9. 21. 13:07





요즘 삭발이 유행이다

삭발 하니 잠시 옛일이 떠오른다.

고교시절 좋아하는 그림을 할 것인가 고민했지만

농사지으시던 부모님의 가난을 끊어보려 공부에 전념해야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각오를 다져야 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의미로. 잘 다듬어진 학생머리를 빡빡 밀었다.

범생이었던 나를 보고 친구들이 무슨 일 있냐며 묻던 기억이 난다.

밤늦도록 도서관을 전전 했으며 방학 때에도 학교에 나가 교실구석에 의자로 성을 쌓아 놓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책과 씨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다. 실패 덕에 결국 군에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좋아하는 그림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가난은 이제 친구가 됐으며 자연스러워 졌다.

생활이 아닌 생존의 늪에서 허덕이던 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지만 아직은 살아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다.

 

구국의 결단이요 민주주의의 수호라며 삭발삭발 하는데

그대들이 하는 삭발에는 왠지 감동이 없다.

왜 그럴까. 그 답은 이렇다. 진정성이 결여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화가의 그림에서도 구성이나 색채 선묘 등이 이미지화 됐을 때 진정성이 안보이면 감동이 없다.

 

뭘 몰랐지만 어린나이에 했던 나의 삭발, 스님이 되기 위해 속세와 연을 끊는 출가의 삭발에는 사심이 없는 것이다.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과의 진솔한 약속인 것이다.

삭발한 얼굴에 세상의 고민을 짊어진 비장미가 흘러도 부족할 텐데

율브린너가 미남이냐 내가 더 잘생겼다따위의 발언을 해대니

세상이 감동하겠는가. 뒤이어 삭발한 이에게 먹물을 씌우는 행위 아닌가.

이렇게 행동이 가벼우니 그대를 누가 믿으며  깊이 따르겠는가.

지도자의 행동에는 개인과 달리 태산보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그 좋은 머리로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늦게라도 삭발 줄서기를 스톱시켰다니 다행이다

 

 

 




 

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