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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칡뫼 2023. 1. 31. 12:18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 나는 어르신들 술자리 옆에서 말씀을 귀동냥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저런 말씀들이 많았는데 서울구경 이야기나 동네 이야기를 하시다 갑자기 죽산(조봉암) 선생 이야기 나오면 모두 목소리를 갑자기 낮추어 이야기 하곤 하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나는
나중에 죽산이 누구냐고 여쭤보면 넌 몰라도 된다며 일절 말을 자르고 대답을 회피하셨다. 그 뒤 서울로 와 공부를 하며 백범 선생은 알았지만 죽산이나 몽양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주는 역사선생이 없었다.

     나중에 그림을 그리면서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져서야 죽산 조봉암 선생을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고향 김포에서 가까운 강화분이셨다. 강화나 김포는 사실 한동네나 같았다. 고향 어른들 술자리에 그분 이야기가 오른 이유였다.

    죽산에게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한 가지만 이야기한다면 지금의 우리가 아니 우리나라가 있게 한 소중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승만 정부의 그나마 챙겨줄 수 있는 치적인 농지개혁이 사실 죽산 선생의 밑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그를 이승만은 협치의 모습으로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했다. 그 결과 토지개혁에 경자유전의 원칙을 실행한 것이다.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바꾼 것은 지나 보니 혁명이었다. 민중들에게 희망을 심어 줬으며 전쟁 후에도 그 농토의 힘으로 가난했지만 타오르는 교육열에 너도나도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 60.70대 연령이 그 첫 수혜자들이다. 그 결과 전 국민이 지식과 정보를 습득 유식해졌으며 결국 나라를 발전시켰고 어쩜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할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죽산 선생은 일본과 러시아 유학을 한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에 3ㆍ1 운동으로 1년 옥고를 치르고 1932년에는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7년 복역을 했고 1945년 다시 검거됐으나 해방으로 풀려난다. 일제강점기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해방과 동시에 1946년 공산당을 탈당하고 정치에 입문 뒤에 진보당을 이끌며 급성장한 정치인이 된다. 1952년 대통령선거와 1956년 선거에서 상당한 득표로 이승만을 위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인기는 비운의 생을 맞는 이유가 되는데 결국 이승만 세력에게 장기집권의 커다란 걸림돌로 보이게 된 것이다. 즉 제거대상이 된 것이다.

    조작수사가 시작되고 북한을 들락이며 밀무역을 하던 양명산을 잡아 진보당 창당자금으로 돈과 북의 서류를 죽산에게 줬다고 허위 자백하게 하여 이를 근거로 기소하게 된다. 문제는 증거가 맞지도 않고 양명산도 뒤에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게 된다. 결국 판사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의 간첩 혐의는 무죄로 선고하고 조봉암에게만 불법 무기 소지죄를 적용하여 5년 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결국 2심에서 검찰이 다시 강하게 내세운 게 진보당의 '평화 통일' 정강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고 조봉암은 바로 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만다. 어디서 많이 보던 시나리오 아닌가.
권력이 판검사를 쥐락펴락한 첫 번째 사건인 것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선고 약 5개월 후 1959년 7월 3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 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패자로로 죽음의 길을 가오."

이 일이 있고 다음 해 이승만 정권은 그리 바라던 정권유지를 위해 3.15  불법선거를 저지르다 결국 4.19 혁명으로 쫓겨나 역사의 죄인이 된다.

    이승만 세력의 집요한 정적제거 방법은 훗날 정치 권력자들이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론의 교과서가 된다. 물론 조작수사는 일제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애국지사를 잡는데 써먹던 방법이겠다. 그 뒤 이 방법은 진화하여 1964 년 인혁당 사건과 유신시절 1974년 인혁당 재건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법살인은 정점을 찍는다. 당시 대법원이 1975년 4월 8일 상고를 기각하자 뭐가 그리 급한지 바로 다음날인 4 월 9일 사형을 집행했다.
치욕스런 우리의 역사다.

아무튼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지인들과 가족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결국
2011년 대법원은 진보당 사건 재심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복귄이 되었다.


칡뫼 요즘 정치판을 보니 죽산 선생이 떠올라 긴 글이지만 정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