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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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체포된 '다미앵'이란 사람은 칼을 들었던 손은 황산에 녹여졌으며 사지는 묶여 말에 의해 절단되는 공개처형을 당했다. 소위 동양의 능지처사라는 형벌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이 형벌로 생을 마감했다. 때는 광해군시절 1618년이다.
왕권시대에는 육체에 가해지는 형벌로 권력자의 힘을 과시했으며 공개 시연을 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했다.
죄인의 머리를 잘라 장대에 높이 걸어 많은 사람이 보게 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성이 강조되고 인권주의라는 미명하에 육체에 가해지는 처벌은 사라지고 격리하는 형벌이 탄생한다. 소위 감옥의 탄생이다. 육체적 형벌에서 정신적 고통으로의 진화랄까.
이러한 사유를 깊이 고찰한 이가 미셀푸코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그의 논리는 감옥의 탄생으로 처벌은 육체형에서 정신형으로 진화했으며 감옥에서는 규율로 죄수를 다루게 되었다. 사실 감옥은 처벌보다는 자신의 말을 따르는 교화에 중점이 있었다 할 것이다. 감옥에서 발달된 통제의 수단 규율은 널리 확대되어 결국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았는데 학교, 공장, 군대, 병원 등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을 양산했다는 이야기다. 즉 시간과 공간을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일반대중을 지배하는데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 그리고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장소성 등으로 우리를 감시한다. 감옥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표준화할 필요성으로 건축학, 광학, 심리학, 병리학 등 인문학 발전의 모태가 됐다는 주장까지 한다. 이런 사유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까지 조망한다.
한 때 틈만 나면 서대문 형무소를 찾았었다. 근 현대사 공부를 하다 보면
꼭 들르게 되는 공간이고 생각도 많아지는 데다 붉은 벽돌이 주는 묘한 느낌이 있어서였다. 두툼한 옥문을 보면 기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밖에서는 평면이지만 안에는 위아래 좌우 대각선으로 파인 모습이다. 즉 간수는 구멍을 통해 감방 안의 모습을 상하좌우 방해받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구조인데 반해 죄수는 결코 안에서 밖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감옥에서 죄수는 늘 감시받는 느낌을 갖는다. 이런 구조의 원형을 푸코는 원형감옥 파놉티콘에서 찾았다. 원형탑에 간수가 있고 사방이 감옥일 때 쉽게 죄수들을 감시하는 구조다. 여기서 주요한 사실은 감시자 즉 간수의 동작이나 모습은 죄수가 알 수 없게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간수의 수는 죄수에 비해 극히 숫적으로 적다. 효율적인 감시체제라는 이야기다.
지금은 어떤가? 이런 방식의 감시구조는 갈수록 정교화되고 세분화되었다. 사실 우리는 방식만 다르지 죄수처럼 알게 모르게 감시와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핸드폰번호, 카드, 주민등록번호, 군번, 인터넷 아이디 등으로 수인번호처럼 평생을 새기고 살지 않은가?
권력자들은 과학 또는 지식이라는 미명하에 지배자의 담론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즉 권력과 지식의 상관관계다. 이제 이 둘은 공생관계가 되었다. 많이 배운자가 권력층에 진입하고 서로를 위한 보호막이 된다. 국민을 위한다는 거창한 말은 꼭 잊지 않고 한다. 지식 정보를 틀어쥐고 과학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계도하고 언론을 통해 담론을 생성 확산한다. 확성기 시대가 지나자 기술의 발달로 언론은 더욱 권력자들의 입 맛에 따라 수많은 지식 담론을 국가적으로 양산해 냈다. 빨갱이가 있었고 부정부패, 장발족, 몸에 좋다는 혼분식, 애국팔이, 개인보다는 단체 우선,
남성 우의 사고, 소수자 혐오 등등이다.
담론은 결코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며 시대가 만든 부산물일 뿐이다. 여기서 주요한 것은 담론의 호환구조다. 끝없는 토론과 주장이 혼재하여 결론으로 유출되는 것만이 시대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추후 역사적 평가와는 또다시 무관하다는 것이 소생의 생각이다.
지금처럼 여론에 관계없이 반대해도
핵세척수를 바다에 방류한다든지 고속도로를 구부린다든지 한쪽으로 자신들이 과학과 지식의 전도사인양 여론을 계도하고 밀어붙이고 나팔수 언론으로 미화한다. 하지만 권력자들 입맛대로 담론이 생성되는 세상이 아닌 지 오래다. 세상이 바뀌었다.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담론의 형성은 어찌 가능할까 즉 담론의 변화는 개인이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솔직한 자기표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시대의 담론은 조금씩 변하고 새로운 담론과 그 담론에 따른 새로운 권력이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 푸코의 논리다. 여기서 권력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권력이 개개인을 장악하려는 SNS, 인터넷 등 기술발전이 되려 개인의 의사 표출의 창구가 되어 저항의 기점이 되고 있다.
사실 역사는 정의롭지 않다. 깨어난 국민 만이 수렁을 피해 걸어갈 뿐이다. 모두 나서 개인 방송을 활용하자. 언론 통제로 권력을 창출하였던 과거와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자. 누구나 이 세상에 빗금 하나쯤은 그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사악함도 죄이지만 무능한 정권도 이제 죄악인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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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뫼 답답하여 미셀푸코의 사유를 나름대로 되새기며 적어보다. 틀려도 할수 없다. 나홀로 독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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