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지난번 억새 사진을 올리고 나니 갈대가 섭섭할 듯하다. 둘 다 가을의 전령이고 겨울 채비를 서두르게 하는 존재들이다.
마치 손을 흔들며 이별을 아쉬워하듯 들판을 하얗게 수놓는 억새다. 이에 비해 갈대는 억새가 사그라질 때쯤 누렇게 피어난다. 억새는 산이나 구릉을 좋아하는 반면 갈대는 물가를 더 반긴다.
사실 피어난다 했으나 꽃이 아니다. 열매가 익은 형태로 씨를 품은 보푸라기다.
대부분의 식물이 바람을 잘 활용하지만
억새나 갈대만큼 바람을 이용하는 식물도 없지 싶다. 갈대는 늦가을부터 추운 겨울 북풍을 이용해 씨앗을 날리는데 강이 얼수록 멀리 퍼뜨릴 수가 있다.
난 갈대하면 경기도 황해도에서 주로 활동하던 임꺽정이 생각난다. 내 고향 김포도 그렇지만 황해도 해주 강화 김포 습지에는 갈대가 풍성하다. 남녘에는 대표적으로 순천만이 있겠다.
아무튼 조선 명종 때일까. 수렴청정 문정왕후 입김에 그 동생 우리가 익히 아는 귄문세가의 대표 윤원형이 설치던 시대였다. 세상은 피폐했고 요즘 권력자들 부동산 투기하듯 당시 세도가들은 간척사업으로 재산 불리기에 너도나도 나섰던 시기였다.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에겐 갈대숲도 하나의 생활방편이었다. 삿갓의 삿이 엮은 갈대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갈대는 삿갓이며 돗자리 등을 만들어 내다 팔던 가난한 경기도 황해도 백성들의 수입원이었다. 당시 조정은 내수사를 통해 전국토를 거의 왕실 재산으로 편입하다시피했다. 기득권 양반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간척사업으로 만든 땅은 소유권을 인정했다. 결국 갈대밭도 사라지거나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백성들이 도적떼가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당시 생활상 기록을 읽어보면 끔찍하다.
구석에 몰린 삶. 굶어 죽으나 도적질 하다 죽으나 똑같지 않은가. 너무 피폐한 환경에서 나타난 도적이 임거정이다.
이만 적으려다 내가 그림을 그리니 갈대하면 또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노안도다. 갈대 로蘆에 기러기 안雁, 갈대숲에 기러기 노니는 우리 그림 노안도는 발음상 노년의 안락함을 상징하는 의미로 많이 그렸다. 기복 신앙의 믿음이 그림에 투영된 결과다. 우리 그림에는 이와 비슷한 예가 참으로 많다. 갈대와 게 그림도 과거 급제, 합격을 기원하는 용도로 많이 그려 일종의 부적처럼 주고받았다.
그 의미는 생략한다.
특히 조선중기 임진왜란 뒤에 활동한 뛰어난 화가 이징의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 노안도를 보면 그 필치가 농익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그렸던 노인 즉 사대부나 본인의 안녕을 기리는 노안도 이미지는 사실 당시 함께 살고 있던 처절한 가난한 백성들의 삶은 지우고 있기도 한다. 전란을 겪어 백성은 끝없이 곤궁한데 그림은 한없이 평화로우니 말이다. 이런 류의 그림은 오원 장승업을 거쳐 조선 말 심전 안중식이나 소림 조석진에 이어지고 근현대 의제 허백련 옹의 작품에도 즐겨 그려지며 하나의 형식이 되었다.
현실의 직시보다는 바램을 도상화했던 과거 우리 미술의 모습이다.
김포 작업실 위로 가을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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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뫼 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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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노안도

심사정의 게와 갈대 그림

아래 30여 년 전 김포 누산리 수로에서 찍은 갈대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