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 거나?
화가는 무엇을 그릴까? 어떤 그림이 과연 좋은 그림일까? 늘 고민한다. 하지만 쉽게 그 답을 찾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답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옛 그림들을 틈나는 대로 창고로 옮기는 중이다. 먼지를 쓰고 얼룩까지 배인 20대에 그린 그림을 발견했다. 붓으로 털고 보니 비닐 장판이 생기기 전 방바닥에 바르던 기름 먹인 한지에 그린 그림인데 제목은 <어디로 갈 거나> 이다.
이 그림은 80년대 초 시대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민주화 세력이 항거하던 대결의 시대였다. 싸움은 치열했다. 당시 젊은 나에게 비친 세상은 싸움은 싸우는 자만의 것이었고 언제나 그렇듯이 구경꾼은 늘 구경꾼일 뿐이었다. 함께 하지 않는 방관자에 대한 울분도 있었다. 누가 이기던 자신들은 그 결과에 맞추어 살면 된다는 것인가?
그림 중앙의 발가벗은 아이는 나 자신이자 한편 우리 민족의 모습이기도 했다. 아이 모습은 영양실조에 걸린 아프리카 아이들 모습에서 빌려왔다. 실제로 우리에게도 60년대에 손발은 마르고 배만 나온 아이들이 많았다. 거창한 계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 바라본 현실을 친근한 선조들의 작품 이미지를 빌려와 재구성한 그림이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갈 거나. 불안한 시절 걱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난 이야기를 품은 그림을 좋아한다. 그림에서 작가의 마음이 읽힐 때 그림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래서일까 습작기 시절에도 그림 속에 이야기를 넣고 싶어 했던 나를 본다. 물론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하고픈 이야기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아무튼, 이 그림은 당시 젊은 화가들의 해방구였던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전시가 되었다. 연합전이라 몇몇 작가들과 함께 전시 디스플레이를 막 마쳤는데 이 그림 저 그림 바라보던 한 선배가 내 그림을 칭찬해 줬다. 그분은 내가 보기에 병색이 완연했는데 파리한 몸에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 뒤론 그 선배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돌아가신 오윤 작가였다.
동굴벽화나 원시미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자보다 먼저 탄생한 그림은 소통의 수단이 분명하다. 해서 그림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이미지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아직까지 제대로 모른다는 점이다. 어쩜 그 방법을 찾느라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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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거나 1986년작 기름한지 먹,연필 97X79.5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