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농사
예전에 그림을 그리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IMF 사태 후유증으로 살아남느라 힘들고 피곤한 몸이었지만 가슴속 응어리를 배설하는 수단으로 잠깐씩 글은 쓸 수 있었다. 태블릿 PC 덕이다. 아무튼 이리저리 해서 글농사 자격증?을 받았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아버님은 안 계시고 내가 대신 농사꾼 흉내를 내고 있다. 이제 몸이 원했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다. 아래는 오래전에 썼던 등단 소감 글이다. 지금 보니 글농사짓겠다는 건 거짓말이 되었다. 해서 미안한 마음에 정리 겸 작년에는 책 한 권을 엮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글이건 그림이건 세상에 금을 긋는 일이다.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크게 보면 같다는 말이다.
글 농사
팔순이 넘은 아버님은 농부이십니다. 참깨며 들깨, 무, 배추, 고추 등 많은 채소를 길러 내시죠. 땅이 풀리면 올해도 어김없이 밭을 일구실 겁니다.
무학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는 원고지 닮은 텃밭에 육필로 글을 쓰십니다. 언제나 정성을 다하시죠. 그래서인지 글이 살아 움직입니다. 철마다 보내주시는 농작물을 받아 든 아내는 말합니다.
“아버님은 어쩜, 이렇게 농사를 잘 지으실까.”
책 몇 권 더 읽은 아들이 글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봄에 분에 넘치게 글 농사 자격증까지 받아 들고 말았네요. 기뻤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바람과 구름, 비를 친구 삼고 하늘의 마음을 헤아리는 농사꾼의 모습, 흙을 보듬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 밭고랑에 쓴 글을 놓고 밤잠 설치는 번민을 과연 나는 얼마나 안단 말인가. 모든 것이 걱정입니다
농부의 글은 밥상에 올라 생명을 살립니다. 책상 위에 놓인 제 글이 읽는 이의 마음 한 자락 보듬을 수 있을는지. 이 엄중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끌어주신 선생님, 모든 인연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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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뫼 비 오는 날 과거에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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