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전과 다르게 많은 생각을 남겨 주었습니다. 시각예술이 갖는 힘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할까요. 작가가 의도한 시지각 논리와 관람객 시선의 괴리도 보았으니요. 그림에서 그리기는 배우지만 문자와 달리 보는 법 읽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각은 어쩜 본능에 가깝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차이를 루돌프 아른하임이란 분은 '미술과 시지각 Visual Thinking'이란 책에서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지각 못지않게 시각 또한 본질적 지각의 한 형태로 결코 언어에 뒤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죠. 그게 시각적 지각(시지각)이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언어보다 앞섰다 할 수 있습니다. 말이나 언어 탄생 이전에 이미지 즉 시각적 지각은 생존의 문제였으니요.
하지만 갈수록 복잡한 세상, 화가는 작품을 통해 말을 하려고 합니다. 해서 전과 다르게 그림이 복잡하고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상징이나 기호, 선 면 색 등을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한 예죠. 참된 작가라면 화폭에 이유 없이 줄을 긋거나 색을 칠하지는 않습니다.
'꽃'이라는 단어를 그리는 화가도 있지만
'꽃은 아름답다'를 표현하는 화가도 있겠죠. 하지만 '꽃으로 세상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도 있을 겁니다. 작가는 작품전을 통해 자신의 말,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유세계를 펼쳐 보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번 제 전시의 주제작 <황무지. 유령의 벌판> 을 보겠습니다. 작금의 대한민국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에는 다양하고 기발한 표현 방식이 있지만 저는 그림 속에 기호(상징물)를 늘어놓아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을 씁니다.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종교가 위태롭고(기운 십자가나 꺾인 십자가) 지식이나 학문의 위기이며 (무너질 듯 쌓인 책) 1등 주의(거꾸러지는 숫자 탑 혹은 나열된 숫자)가 판을 치고 불신의 세상(솟아나는 철조망)이며 세계적으로 자본이 폭력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무서운 얼굴이 그려진 100달러 지폐) 정의를 지킨다는 사법부는 신뢰를 잃고 있으며( 허수아비 사법 삼형제) 믿었던 인재의 산실 서울대는 신뢰가 일치감치 추락한 (고꾸라진 서울대 정문) 세상인 것입니다.
거기에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확성기 탑)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처럼 아름답지만 죽음의 노래가 울리는 황무지 아닌가요. 거기에 국토는 분단되어 (휴전선을 차용한 번갯불) 있습니다. 황무지에 버려진 존재감 없는 존재는 유령(먼지, 붉은 점)처럼 떠 돌고 있죠.
제 작품을 이리 설명하는 것은 제가 제시한 이야기를 읽어 주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림은 쉽고 직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꽃, 풀, 돌, 나무 하면 이야기가 안 되지만
꽃이 피어있고 풀이 무성하며 군데군데 돌이 있고 나무가 크게 자라 하늘을 가리더라 하면 숲이 연상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작가 자신도 정돈된 메시지가 아니면 말할 수 없고 독자 또한 그림을 언어로서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화폭에 늘어놓을 수 있는 표현 방법은 수만 가지 일 겁니다. 작가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고 독자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읽어내면 좋겠죠. 물론 이미지는 느낌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력이 넘치는 여자를 보면 이야기가 나누고 싶지 않나요. 그림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말 없는 작품보다 말 건내는 작품을 만날 때 그리고 그 말을 알아들었을 때 행복합니다.
'내 작품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마라' '그리는 동작이 있을 뿐 아무것도 안 담았다' 한 작가도 있죠. 그렇지만 그 또한 작가의 말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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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지나고 한참 지나니 이제 일상이 보이고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마침 종해역사연구소 권태운 소장님이 제 발언을 간첩 녹음하듯 해주셨네요
공유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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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 작품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ㅡ칡뫼 두손모음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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