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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락 교수님 글

칡뫼 2026. 1. 20. 20:01

페이스북에서 지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멋진 페친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중 김정락 교수님의 글은 예술 전반 문화를 어우르는 식탁입니다. 동서양 미술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해 서술해 주십니다.
짧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는 미학 전반의
에세이는 페친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필요한 부분은 문을 열고 스스로 깊이 들어가 공부도 하게 만듭니다.
얼마전 수전 손탁의 <예술과 공감>이란 글을 읽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답글도 달았지만 부족했네요.
해서 수전 손탁의 사유를 나름 공부하고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래 칡뫼 수전 손탁 반박 글

수전 손탁이「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비판한 것은 해석 일반이 아니라, 작품을 어떤 의미 체계로 환원해 버리는 폭력적인 해석이었다. 그녀의 문제의식은 작품이 하나의 개념, 하나의 메시지로 ‘번역’되는 순간 감각적 밀도와 형식의 생동이 사라진다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나는 손탁의 논리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손탁의 주장에는 하나의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감각은 해석이 개입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오늘의 관객은 이미 의미를 찾도록 훈련된 존재이며, 감각 역시 문화적·역사적 경험을 통해 매개된다. 감각은 언제나 순수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고 축적된 지각의 결과다.
또한 아무리 감각 중심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에는 작가의 사유 흔적이 남는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형식 선택·구성·배치·생략의 과정은 사고의 결과다. 작품을 오직 ‘현존하는 감각’으로만 다루는 태도는, 역설적으로 작가의 실존을 소거할 위험을 안고 있다.
해석은 작품을 고정된 의미로 환원할 때 폭력이 되지만, 작가가 무엇을 소화했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더듬는 읽기가 반드시 폭력일 필요는 없다. 작품에는 언제나 해석되지 않는 잉여가 남고, 그 잉여가 해석을 무력화한다. 그렇다면 해석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독해일 뿐이며, 비평은 작품을 대신 말하는 권력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읽을거리로 남는다.
손탁이 요구한 감각의 회복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감각 위에서 다시 사유가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봉쇄할 필요는 없다. 감각 이후의 생각, 형식 이후의 질문 역시 작품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해서 그림을 막 그려도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ㅡ 칡뫼 생각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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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