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가 도래하며 인간의 작품과 AI 작품의 근본적인 차이는 뭘까? 작업을 하다가도 이 붓질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고민이 많은 요즘이다.
<인간이 생산한 작품이 갖는 힘은 뭘까?> <AI작품은 주문과 동시에 생성되는 일종의 복제물이 아닌가? >를 놓고 생각해 봤다.
이런 점에서 연휴를 맞아 발터 벤야민의 사유 '아우라' 개념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을 제의가치 전시가치로 나눠 살펴보면서 여러 깊은 사유를 펼친다. '아우라'는 작품만이 갖는 신성한 기운으로 유일성, 독창성, 현장성, 원본성 등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대상을 복제(사진 영화)하는 행위는 유일성 현장성 등을 해체하여 아우라의 상실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복제기술 즉 사진 영화등이 일반 대중에게 예술이 향유되는 수단으로 작동하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전에 명망 있는 작가의 전시회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작품 수가 상당했다. 신선한 발상의 작품에 감동했다. 하지만 일정한 주제의 작품전은 작품마다 구성과 색감은 달리했으나 볼수록 감동이 평준화되었다. 결국 모두 친견했지만 나머지 그림은 볼 필요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감정은 몇 해가 지나도록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그럴까? 당시 작가의 작품은 밑그림을 드로잉이 아닌 피그먼트 프린트 위에 칼라링을 한 작품들로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나만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았다.
《피그먼트 프린트 위에 안료로 개입하는 작업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동시대적 감각을 구현한다고 할 수 있겠다. 판화와 다르며 사진과도 구별되는 회화작업으로 한편 신선한 점도 있다. 기술이 발달하고
장비도 많아진 요즘 기발한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연속된 시리즈로 마주할 때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강렬한 감흥 대신 익숙한 정서의 반복을 경험하게 된다. 한두 점에서 발견한 감정이 이후의 작품들에서 새롭게 확장되기보다, 비슷한 감정의 복제처럼 평탄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작품의 완성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안정된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이라는 바탕은 이미 구도와 거리, 빛과 서사를 일정 부분 결정해 둔 상태이며, 회화적 개입 즉 물감 바르기는 그 결정된 질서를 강화하는 도구로 작동하기 쉽다. 그 결과 화면은 회화의 모습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탄생과정의 위험’이나 ‘붓질의 시행착오’가 드러나지 않는다. 차갑게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에 대입한다면 ‘유일한 존재로서 작품이 갖는 거리감`과 ‘대체 불가능한 시간의 흔적’이 적당히 소멸된다는 점이다. 즉 손맛을 벗어난 바탕에서 출발한 작업은 작품의 아우라를 감소시킬 뿐 아니라 고민 없는 소비성 이미지로 다가온다. 결국 관객은 작품이 품고 있는 새로운 감흥을 발견하기보다, 이미 확인한 정서를 또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작업이 지닌 미덕도 존재한다. 세련된 구성과 이미지의 정밀함, 동시대 시각언어에 대한 높은 이해와 화면의 견고 함이겠다. 하지만 그 견고함 때문에 작품은 ‘살아있는 불완전함’과 ‘따뜻한 어리숙함’을 잃고 만다.
사진을 밑그림으로 쓰는 순간, 손이 더 이상 '사유하며 찾아가는 과정'을 겪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인간적 흔들림이나 우연성, 망설임, 다시 그리기 같은 것'들이 증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감동의 평준화 이유는 아우라의 소멸도 있겠지만 인간의 불완전한 시각이 드러나지 않은 결과가 아닐까? 내가 보기에
'인간의 작품은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한 것이다.' 이런 점이 AI작품과 인간 작품의 차별점이며 계속 사유를 가져갈 부분이라 생각된다. 즉 벤야민의 말한 '지금 여기에'에 함유된 유일성과 그를 담보한 시간성, 역사성의 아우라가 그 답이지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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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뫼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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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