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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청문회를 보고

칡뫼 2023. 4. 18. 08:58

요즘 우리 주변의 상황을 보고 있으면 생각보다 끔찍하다. 그동안 감추어졌던 온갖 더러움이 다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악한 존재였나 싶다.
소위 기득권이라 불리는 자들이  태연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벌이는 욕망의 시연은 봐주기가 힘들 정도다. 시스템 속에서 하는 일이라 죄가 없다는 식이다. 겉으로는 공공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그들만의 세상을 살고 있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에서 재판이 열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구인된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독일인의 죄를 묻는 재판이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친위대원으로 수백만 유태인을 분류 이송시키고 가스실로 보낸 장본인이었다.

2023년 4월 14일 여의도 국회에서는 정순신 아들 학폭 청문회가 열렸다. 증인으로 채택된 학폭 가해자와 아버지 정순신 외 가족은 심신 미약 등을 이유로 불참하고 강원도 교육청 학교폭력담당 변호사 정진주 씨를 비롯 학교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예루살렘 법정에는 2차 대전 중에 독일에서 공부하고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아렌트라는 유태인 여성 철학자가
있었다. 그녀는 '뉴요커'라는 잡지사의 부탁으로 재판을 취재 기고하는 중이었다. 재판을 수개월에 걸쳐 취재하고 기고하면서 그녀는 놀라운 충격을 받는다. 수많은 유태인을 사지로 몰아넣은 피고 아이히만은 옆집 아저씨처럼 생긴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 공무원으로서 명령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일을 했을 뿐이었고 인정받아 자랑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기사를 정리해 책을 발간한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가 이 책의 부제다.

책에서 일반적으로 저지르는 악은 출세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업무를 지시한 상관에게 인정받고, 이를 발판 삼아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욕망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이다. 아돌프 아이히만 그를 학살자로 만든 것은 결국 어리석음이 아닌 순전히 '무사유'였다는 결론이다. 세상을 사유 없이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이 악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우리 국회의 학폭 청문회를 보자. 우연히 보게 된 중계동영상에서 정진주 변호사의 자세를 보고 너무나 놀랐다.
그녀는 피해자 진술과 발언 모든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격리하는 조치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과 가해자의 폭력 인과관계가 불충분하다는 논리를 들어 반대했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자살시도에 황금 같은 청소년기를 정신질환 속에 보낸 의사진단서를 보고도 하는 대답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에 찬 어투로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예루살렘 법정에서 대답하는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슬픈 장면이었다. 사실 피해자의 가슴 아픈 사연이 실제여도 법리를 들이대며 너무 태연하고 당당하게  발언하는 모습에
더 크게 놀랐다. 더군다나 그녀는 학폭대책 변호사였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 재판을 보고 악의 생성과 서식상태를 파악했다면
나는 학폭 청문회를 보고 악의 잉태와 분만 과정을 보았다.
가해 학생은 부모의 권력에 젖어 약한 아이를 괴롭혔다. 그의 행동이 제어가 안되니 그는 당연히 권력과 힘을 숭앙하는 악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 분만을 도와준 것은 우리 사회 구조이며 권력의 눈치를 보는 주변의 어른들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악의 숙주가 되고 있다. 그리 살아야 잘 사는 것이라 믿는다.
과거 정순실 딸 정유라는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라며 자신의 논리를 폈다.
정순신 아를 정윤성은 동급생 피해자를 왜 제주도에서 태어났냐고 비아냥거리고 괴롭힌다. 태어나는 것도 능력인가. 이렇게 악은 우리 곁에서 자라나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내가 사는 환경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칡뫼 학폭청문회를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