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샘의 때깔나는 명화 감상
-칡뫼 김구의 '어디로 갈 거나'(1983)
'A painting is a thought'
대체 그림에는 무엇이 담겨 있고, 그 무엇을 표현하자는 것인가 다만 볼 뿐인가 그러나 그림도 뭐 언어의 세계처럼 하나의 욕망과 꿈, 의지를 담고 있을 것이니...여기, 칡뫼 김구의 그림에는 다단계 사유로서의 변증법적 모색을 담고 있지 않은가...
뭐 변증법이야 잘 아는 얘기지만 동일(정)과 비동일(반)의 동일성(합)의 법칙을 말하는 헤겔 고유의 심오한 생성 이론이 아닌가
그래 이 그림이 우리의 눈길을 머물게 하고 저 깊은 사유의 뜰을 거닐 게 함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하나의 시대적 환경a periodic milieu으로 1983년이라는 엄혹한 독재시대에 놓고 이 그림을 본다고 전제하고 볼 때에 있어서 그림의 화자가 묻고 있는 것은 '어디로 갈 거나'라는 생의 화두다 그 하나의 길이 현실도피로서의 관조의 길이요, 다른 하나의 길이 현실참여로서의 투쟁의 길이다
화가는 익숙한 전통 회화를 반복하는 기법을 통해 우리를 낯설게 하기보다는 친숙한 기호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니까 전자는 강희안의 문인화 '고사관수도'에서, 후자는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에서 일부를 갖다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화가의 눈높이에 맞게 재구성, 재해석되먼서 새로운 의미의 차이를 낳고 있다는 데에 작도의 새로움이 있다 즉 높은 망대에서 내려다보듯 현실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한가한 자들에 대한 비판의 눈길이 그 하나요, 자기만이 옳다고 샅바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악한 정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그 또 하나다 그러니까 여기, 한가한 자가 정these이라먼, 샅바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들이 반anti-these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과연 두 극단을 떠나듯 양변을 떠나 있는 나의 정체성이다 바로 여기, 대자적 거리를 유지한 채 나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지고 있는 이 그림이 지금도 여기 서 있는 나에게 유효한 것은 무엇인가 그렇지만 바로 여기, 저 출구 없는 막막한 현실 한가운데 서 있는 나들에게 하나의 진전운동으로 새로운 그 무엇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끊임없이 호명해 내고 있다는 데에 이 그림이 던지고 있는 진지한 사유의 깊이가 있다
또한 우리는 이 그림에서 특이한 질감과 양감이 어우러진 삶의 무늬를 접하는 데서도 그림만이 지닌 그 특별한 예술적 아우라를 접한다 그것은 결코 화려하지도 어둡지도 않다 그것은 하나의 스펙큐레이티브한 사색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적절한 선택이었던 듯하다 3단으로 구조화된 기하학적 구성은 이런 사색적인 분위기를 더욱 견고하게 떠받치고 생기있게 뛰어놀게 한다 왜냐하먼 거기 양자를 사유의 거리에 두고 있는 나의 실존적 고독이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격렬히 다툴 수도 없지만 현실과 어떻게든지 앙가제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아의 고뇌가 독자와 충분한 공감을 나누게 하는 적절한 미적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비록 잘록한 개미같이 작은 미물로 내가 표현되어 있지만,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욱 미광을 발하먼서 그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는 바로 나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들과 결코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는, 그렇다고 해서 또 반드시 그들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지만, 그러니까 나는 아직 분화되고 결정되지 않은 미분화되고 미결정된 상태에 놓여있지만 이 작품이 하나의 미적 가치를 발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하나의 해결점으로서의 열린 지평으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기대를, 가능성의 여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화가는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저것을 지양한 제3의 반성적 지점에 나를 위치시키고 나를 대자화시키고 있다는 점, 가령 김수영이 머리로서만도 가슴만으로도가 아닌 온몸으로서의, 육탄의 시학을 통해 그만의 개성적인 민중적 변증법을 보여준 것처럼, 꼭 그처럼 바로 여기, 현실'로부터'의 문제도 아니고 현실'에로'의 문제만도 아닌 그 현실'을' 하나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이것이 우리를 저 미적 대사유의 숲으로 이끄는 그만의 사회적, 대승적 화풍을 엿보게 한다
그림은 하나의 기호막대이니, 그것은 그대로 간접화된 그 무엇을 담고 있는 기호다 그러나 단순한 기호막대도 간접화된 그 무엇만도 아니라는데, 즉 그림은 하나의 사유라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먼, 우리는 여기 칡뫼김구의 명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사유의 피라미드랄까, 미적 방법에 대한 뛰어난 소양으로서의 하나의 고전적 인식론을 마주한다
난 그렇게 본다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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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뫼김구의 '어디로 갈 거나'(19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