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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몇개

칡뫼 2024. 9. 9. 12:43

안개가 걷히자 세상이 닦아놓은 흰 고무신 같았다. 멀리 섬이 보이고 그 앞으로 갯벌이 누워있고 포구는 그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었다. 시련을 이겨낸 흔적일까. 갯벌 위에는 삶의 느낌표처럼 점점이 김발 장대가 박혀있었다.

 <추억이 담긴 그림 한 점>

 

무덤가는 야생화의 천국이다. 봄에는 미나리아재비가 살랑거리고, 오뉴월이면 솔나물, 여름에는 마타리, 타래난초, 멍석딸기까지 지천이다. 이제 개솔새가 하늘거리고 억새가 하얗게 피어나는 가을. 카메라를 삼각대에 걸치고 야생화를 담았다. 사진을 찍다가 발아래 있는 돌콩 꼬투리를 까보았다. 콩 알갱이가 고르게 들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쭉정이도 보이고 덜 자란

알갱이도 함께 들어있었다.   <용재 아저씨>

 

뻗은 가지마다 세월이 맺혀 있다. 위로 가려다 막히면 내려가고 꺾이면 잠시 멈추고 다시 곁가지를 뻗었다. 하지만 어느 구석에도 힘이 실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겨울나무>

 

죽느냐 사느냐? 뽑히느냐 뽑히지 않느냐? 선택된다는 건 버림받는 것, 선택된다는 건 살아남는 것. 난 한참을 생각하다 풀 뽑을 엄두를 못 내고 흙 묻은 손을 수돗물에 깨끗이 씻었다. <풀을 뽑다가>

 

 

붓을 조금만 덜 씻어도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았다. 색을 다루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색은 까다롭다. 외골수다. 자기와 조금만 다른 녀석을 만나면 즉시 표정이 변한다. 한번 변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변심한 애인 같다.

<색으로 된 세상>

 

언제나 진실은 아는 것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다. 난 항상 그것이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그려 보고 싶다.

<본다는 것>

 

내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은 거짓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마치 화가가 자화상을 그려놓고 나의 모습이라 우기는 것처럼.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