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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칡뫼 2025. 4. 2. 10:16


오늘이 4월 1일이다.
4월만 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문장이 하나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란 말이다. 이 문장은 알다시피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실 원문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다.

헌재가 4월 4일 윤석열 내란사건에 대한 평결을 한다고 공지했다. 만우절이어서 잠시 당황했다. 도대체 믿을 것이 없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임을 알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파면 선고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 속에 저항으로 1919년 3.1 운동이 있었고
그 힘으로 4월 11일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광복 후에는 1948년 제주 4/3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고 지금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196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죽음으로 4/19 민주혁명이 일어났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도 있었다. 봄이면 나는 산불은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12.3 내란 사태로 그 해결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4월이 되니 다시 잔인한 4월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동안 그려오던 분단서사에 이어 몇 년 전부터 작품 '황무지' 연작을 시작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은 분단현실에 더해 들여다보면 볼수록 황무지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해서 젊어 거의 제목만 알고 있던 T.S 엘리엇의 '황무지' 시집을 구해 읽었었다. 읽어보니 난해해서 도대체 와닿질 않아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서문과 제1장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에 나오는 대목은 나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부분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 "

사실 5장으로 된 시는 엄청 길다. 일반적인 서사와 달리 뜬금없어 보이는 문장이 이리저리 삽입되어 시간 공간을 뛰어넘으니 거의 공감 불가이지만 한 문장 두 문장 읽다 보면 나름의 해석이 되기도 했다.

특히 시 황무지의 서문은 전체 시를 관통하는 문장이므로 꼭 이해하고 싶었다.

황무지(荒蕪地)

한 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이 부분인데 여기서 "죽고 싶어"라는 말과 '쿠마에의 무녀'를 이해해야 했다. 공부해 보니 쿠마에 무녀(Cumaean Sibyl)는 아폴론 신전에 사는 나이를 먹지 않는 사제로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그리스 식민지 쿠마에에 살고 있는 무녀였다.
이런 사연이 있다

아폴론 신이 그의 사랑에 대한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아폴론 신에게 한 줌의 모래를 들고 와서는 손에 들고 있는 모래만큼 살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오랜 생명’만 요청했지, 그에 따르는 젊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후 그녀가 그의 사랑을 거부하자, 무녀의 육체를 늙게 만들어 버려서 영원한 젊음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의 육체는 세월이 가면서 점점 쪼그라들어 조그만 항아리에 보존되다가, 결국 죽지 못하고 그녀의 목소리만 남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녀가 왜 죽고 싶다고 했는지 의미가 이해가 되었다.

시인은 서문에 1차 대전 후의 황폐한 사회를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를 짧은 글로 서술했으며 문학적 성취에 엄청난 도움을 준 에즈라파운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서 세상을 알아갈수록 우리가 처한 현실은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시인이 황무지를 쓴 이유일 거다.
황무지 같은 세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이 쿠마에 무녀처럼 죽지 못해 사는 삶의 정체성을 표현한 문장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할 것이다.

많이 배워 시험을 통과한 인간들, 검판사 나리들과 관료들 그리고 정치인과 비겁한 학자들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가뜩이나 황무지인 세상에 돌을 던져 쌓고 있다.

모르는 것이 약일까? 동토 속에 갇혀 있는 라일락 뿌리는 겨울이 포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을 품고 키워내야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봄은 너무나 잔인한 계절인 것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역설이 오히려 생명의 존재를 드러내는 봄을 칭송하는 것은 아닌지!  끈질긴 삶과 투쟁이야말로  회색빛 세상에 희망을 만든다는 저항에 대한 헌사가 아닐까?

나의 짧은 감상은 시 '황무지'는 세상의 본질을 드러냈지만 그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쿠마에 무녀'처럼 영속성을 지닌 생명력을 찬미한 시로 보인다. 좋은 세상을 향한 민주시민의 끝없는 열정이 아름다운 이유다.
라일락이 향기가 세상에 퍼지는 봄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칡뫼 4월 맞이 넋두리

참고ㆍ 라일락 잎은 익모초보다 쓰다
내가 아는 야생초 그 어느 것 보다 쓰다.
하지만 향기는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