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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날을 기다리며

칡뫼 2026. 1. 30. 16:31


없는 돈에 한지 120호 10장과 화판 10여 개를 들여다 놓았다. 모두 합해 200만 원이 채 안 되지만 화가에겐 쉬운 돈이 아니다. 가을부터 경기가 없어 알바도 제대로 못했다. 그렇다고 고객이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도 아니다 보니 평생 작품으로 살아보지 못했다. 잔금이 조금 남았는데 목공사장이 장소가 좁으니 일단 가져가란다. 다행히 돈을 구해 잔금 30만 원을 치르고 화판을 가져왔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마음에 키워 놓은 작품구상이 사라질까 걱정이 많았다. 이런저런 주제를 사유하며 지내다 어느 순간 떠오른 이미지는 강물에 떠가는 물건 같아서 보일 때 건져야 한다. 그동안 놓쳐버린 작품이 그 얼마던가? 기억으로 안되고 메모도 안된다. 드로잉을 해놔도 그때 번득였던 느낌이나 생각을 소환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나는 어떤 장면이 떠오르면 다듬어 주체하지 못하는 때에 이르기까지 키운다. 부풀리고 키워진 구상은 즉시 화판에 대강의 줄이라도 그어 놓는다. 그러면 생각이 화폭으로 전이되고 마무리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끌고 가는 힘이 생긴다. 즉 떠오른 이미지를 깊이 사랑해서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단계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아니 그래야 작품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작품을 시작하면 생각이 가지를 치고 또 다른 작품도 이어진다. 해서 여러 작품을 펼쳐놓고 동시에 진행하는 편이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판에 종이를 붙여야 하는데 이곳 김포는 영하의 날씨가 20여 일째다. 화판에 발라놓은 종이에 풀이 얼면 접착력이 약해진다. 작업실은 넓으나 보온이 부실해 난로 옆만 따뜻하다.
젊어 그림으로 무얼 할 수 없어 표구사로 생업을 유지했던 경험이 있다. 덕분에 종이와 풀, 바람과 물, 화판의 관계는 잘 안다. 건조는 늘 자연에 맡기고 뜨게 붙이기 한 종이가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려면 물을 활용해 건조부위 순서를 조절해야 한다. 빨리 만들려고 불 가까이 대거나 인공적인 방법을 쓰면 종이는 터진다. 아무튼 작품구상을 잊지 않으려 드로잉도 하지만 전통 한국화 버릇인지  한 번에 머릿속 구상을 옅은 먹선으로 화판에 펼쳐놓고 그린다.

날이 추우니 종이를 붙이지 못해 화목 난로 옆에서 다른 작품을 건드리고 있다. 붓을 잡고 천천히 새 작품에 대한 흥분을 살리고 있다. 가끔 꿈에도 보이니 잘 끌고 가는 중이다.
그나저나  '삼한'이는 어디 가고 '사온'이는 어디 갔나. 날이 연이어 춥다. 전류리 포구에는 밀물 썰물로 강얼음이 깨져 성애 유빙이 북극처럼 떠다니고 있다. 복잡한 세상에 겨우 붙어살며 따뜻한 날을 기다리는 김포노인이다.


칡뫼 종이 화판이 곁에 있으니 맘이 편하다


황무지 우상의 벌판
324x130cm
한지 먹 채색
칡뫼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