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이현실
인사동10길. 채도彩度가 한층 높아져 가는 가로수 단풍을 바라보며 참 곱다!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 틈을 지나 경인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수필가이면서 화백이기도 한 K는 붓을 잡은 지 어언 30여 년이 지난 원로작가이다. 지난해 가을 수필문학 모임 행사에서 인사를 나눈 적 있어서인지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두 손을 꼭 잡는다
<밤 골목 이야기>라는 명제에 따른 20여 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 변방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담기 위해 많은 날을 서성이며 함께 하였을 작가의 영혼이 담긴 그림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전깃줄 사이 어두운 골목에 철가방을 싣고 온 힘을 다해 페달을 밟고 가는 뒷모습의 사내가 있다. 지친 몸을 끌고 손수레를 느릿느릿 밀고 가는 노인, ‘가파른 계단을 조금만 더 오르면 불빛 따스한 우리 집이란다.’ 묵시적 메시지를 던지는 그림이 보이고, 일방통행이라는 ‘삶’의 표지판을 걸고 한쪽 방향으로만 내달리는 차량의 뒷모습도 있다. 빨갛고 파란 줄무늬 형광등이 돌아가는 이발소의 꺾어진 골목에서는 그 언제 적이던가, 아스라한 기억의 저쪽 좁다란 널빤지 위에 걸터앉아 단발머리를 자르는 해맑은 소녀의 수채화가 되살아난다. 오랜 세월 공무원으로 계시면서 언제나 누런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퇴근하시던 아버지의 젊을 적 실루엣이 겹쳐진다.
사람을 주제로 선정한 K 화백의 작품은 일일이 점을 찍어서 완성한 점묘화로 이루어져 있다. 선線을 쓰지 않고 점집합과 짧은 터치로 하나하나 붓을 찍는 기법이기에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한 화법이다. 때로는 미점米點을 횡으로 찍으면서 세상살이 녹록한 게 하나도 없다는 작가의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어본다.
‘산다는 건 기다림’이란 화두에 왠지 감정이 출렁거린다. 화선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린 밤 골목이야기다. 작가는 한때 외환위기의 파열음을 온몸으로 겪으며 밤늦은 퇴근길, 마주치는 골목 풍경에서 삶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하고 작업에 몰두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작가의 고백에서 동병상련과 같은 아픔을 느끼는 것은 우리 가정 역시 질풍노도와 같은 외환위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쓰라린 기억 때문일까.
<귀가>라는 표제가 걸린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코트깃을 세우고 콧잔등을 만지며 걸어가는 가장의 뒷모습이 보인다. 늦은 귀갓길, 처진 어깨 위로 거미줄처럼 엉킨 전깃줄이 있는 배경이다. 그림 속 창문에 비치는 따스한 불빛을 향해 골목을 힘겹게 걸어가는 가장의 고단한 뒷모습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자 바로 내 남편의 모습이 아닌가.
세상이 무섭다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던 사람. 한여름 푹푹 달군 단내가 풍긴다며 멀쩡히 잠겨있는 가스레인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던 사람. 형광등 불빛에도 눈이 시려 자꾸만 넘어지던 사람. 자신만의 블랙홀에 스스로 가둬놓고 한사코 세상을 단절하던 사람. 가장이란 거대한 짐을 혼자 지고 온 몸에 파편이 박힌 사람. 그때 그 사람 모습이 벽에 걸린 그림들 속에 있다.
멀리 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아련히 보이는데 지치고 고단한 하루를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의 그림도 있다. 텅 빈 골목에 정물이 된 의자, 시동이 멈춘 오토바이,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있는 손수레는 내일의 삶을 위해 잠시 쉬고 있는 나른함이 묻어 있다.
세상 밖으로 그가 걸어 나오도록 처진 어깨의 각角을 세워주며 등을 토닥여 준 많은 사람의 격려가 있었다. 의자를 내어주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 사람들은 거래처의 수많은 사장과 30여 명이 넘는 직원들, 동문, 그리고 지인들이었다.
원물구매를 위해 오징어 덕장인 속초로, 건어물 산지인 통영으로, 가락동 새벽시장으로 사장이 직접 화물차를 몰고 뛰어다니던 쉰내 나는 십 수 년. 많은 지인이 그의 성실을 믿어주었다. 쉴 새 없이 뛰어다닌 그의 두 다리를 믿어주었다. 이제 그만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꼭 다시 일어나 재기하라고 응원의 손뼉을 쳐준 사람들은 그의 앞모습보다는 밤늦게 귀가하는 정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뒷모습을 기억했던 것이다.
17년이 지난 지금 그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다. 주름진 눈웃음 속에 녹슨 훈장처럼 살짝 감추어진 그의 상처가 자랑스럽다.
파리 출신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진실은 항상 뒤쪽에 있다. 등은 거짓말할 줄을 모른다.”고 말했다.
캄캄한 어둠의 태클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막다른 골목의 출구를 꿈꿔보지 못한다. 그 어디쯤 자신이 나가야 할 통로가 있는지 한 줌의 불빛을 향해 나가야 할 바를 생각하기 어렵다.
오늘 내가 만난 <밤 골목 이야기> 속 뒷모습은 ‘내일’이라는 아름다운 희망의 촛불을 환히 밝히고 있다. 좁은 골목 끝에 아른아른 보이는 오렌지빛 불빛이 선명하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이며, 뒷모습을 믿어주는 이웃이 있다는 것도 무릎을 죽 펴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비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열심히 살아도 허전한 것이 삶이라는 작가의 고백이 그리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산다는 건 기다림’이라는 작가의 모놀로그가 가슴을 따듯하게 데우고 있음은 귀갓길의 골목 풍경이 사람 사는 모습, 인정과 정겨움, 내일이라는 출구를 향하는 희망의 메타포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에서 이웃처럼 친해지고 싶다’라는 작가의 글에서 그의 정직한 뒷모습을 엿보이고 있다. 나의 뒷모습은 사람들에게 어떤 그림으로 보일까. (20131109)
자신의 전시회 작품 앞에서의 김구 화백(김형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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