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반도 토기의 역사
토기를 빚는 방법은 손빚음법(수타법;手捺法), 테쌓기법(윤적법;輪積法, ring method), 서리기법(권상법;卷上法, coiling method)이 이용되고 있으며, 물레는 사용되지 않았다. 소형의 토기는 손빚음법을 쓰고 있으나 그릇 벽면의 테자국 관찰과 X-ray 사진분석 결과 대부분의 선사토기는 테쌓기법과 서리기법으로 빚었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빗살무늬 토기라는 용어는 일본의 고고학자 후지다가 Kammkeramik(comb pottery)라는 독일어를 즐목무늬 토기라고 직역한데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토기가운데 빗살무늬 토기가 제작되기 이전에 무늬가 없는 무문토기, 즉 민무늬토기가 있는데 빗살무늬 토기보다 하층에 있다.
형태는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어 V자 혹은 U자와 같고 아가리는 직립해 있다.
제작방법은 그릇을 엎어 놓은 상태에서 아가리부터 만들어 위로 올라가므로 그릇을 거꾸로 제작된다.
무늬는 큰 생선의 등뼈 같은 도구를 가지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듯이 토기 표면을 긁어 빗살무늬를 나타냈는데 지역에 따라서 특징이 다르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의 식량 채집 단계와는 달리 식량 생산 단계에 돌입 하였다는 사실이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고, 이를 입증해 주는 것이 토기의 존재이며 토기의 제작은 불을 발견하여 사용하게 된 사실과 표리를 이룬다.
생활용기로서의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는 단순한 용기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빗살무늬의 세련된 양상은 그들의 미적 표현의 대상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석기 시대의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隆起文土器)
토기의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맞집어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부산 동삼동, 통영 상노대도, 연대도 조개더미 등에서 빗살무늬토기층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에서 주로 출토되지만 북으로는 양양 오산리, 서북으로는 신안 흑산도, 내륙지방으로는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조사가 진행되면 분포범위가 더 넓어질 가능성도 있다.
○ 덧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는 달리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점차 북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처음에 어디에서 이러한 토기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이나 해안을 통한 전파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즐문토기]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 신석기 시대. 토기의 겉면에 빗같은 무늬새기개[施 文具]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그린 토기. 대체로 나무,뼈 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면에 짤막한 줄을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부른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선, 점선으로 된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뼈처럼 생긴 것이다. 그릇 모양은 밑창이 달걀처럼 생긴 것과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鉢]처럼 생긴 것 이 대표적인데, 그릇 종류에는 독모양이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 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바탕흙에는 진흙에 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활석부스러기 같은 것을 섞은 것이 있으며, 그릇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이 기본을 이룬다. 대체 로 섭씨 600∼700℃의 열을 가하여 구운 것인데,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 없이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3) 청동기시대토기 - 민무늬토기(무문토기 無文土器)
청동은 구리, 주석, 납이 주로 들어가며 이와 같은 청동제품을 사용하던 시대를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청동기를 사용한 곳은 B.C 3700년경의 이집트이지만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상한년을 약 B.C 1000경으로 본다.
신석기시대를 빗살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 하는 것과 같이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 문화시대라고도 한다.
민무늬토기라 함은 그릇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모든 토기를 가리킨다. 민무늬토기는 대체로 갈색 혹은 황갈색을 띠고 장석, 석영립등 굵은 모래가 섞인 태토를 사용하였으며 민무늬의 평저(평평한) 기형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는 상당히 발달된 사회구조를 형성하여, 고조선 부여같은 부족연맹체를 이루었던 시대로서 고도의 정치적 사회가 운영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밭농사를 주로 한 정착된 농경사회였으므로 안정된 생활은 토기 제작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릇의 형태면에서도 전에 볼 수 없었던 실용적인 항아리, 속이 깊은 사발 등과 같은 모양을 기본으로 하여 대전, 굽다리잔 등 일상 용기의 일면을 보여주며 양측면에 손잡이가 달려 물, 술과 같은 음식을 나르는데 편리하도록 된 기형도 있다.
때로는 칠무늬토기와 같이 장식적인 무늬가 시문된다. 이것은 그릇에 채색을 넣음으로써 특수한 용도로서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일면을 공예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민무늬토기(무문토기 無文土器)종류
1. 구멍무늬토기(공열토기 孔列土器) : 아가리 바로 아래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1줄 내지 2줄 로 돌아가며 배치된 토기.
2. 골아가리토기(구순각목토기 口脣刻目土器) : 아가리에 눈금을 새긴 토기.
3. 팽이토기(각형토기 角形土器) : 바닥이 지름 3∼5cm 정도로 작고 그릇모양이 팽이처럼 생긴 토기.
4. 붉은간토기(적색마연토기 赤色磨硏土器) : 겉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5. 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彩文土器) : 어깨부분에 검은색의 가지무늬가 베풀어진 토기.
6. 검은간토기(흑색마연토기 黑色磨硏土器) : 겉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토기.
7. 덧띠토기(점토대토기 粘土帶土器) : 아가리에 진흙 띠를 덧붙여 겹아가리를 만든 토기.
8.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 : 화분 모양의 토기.
송국리식 토기는 기원전 5∼4세기의 토기로 충남 부여군 송국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기 문화는 우리나라 민무늬토기시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이 시기부터 벼농사가 이전의 밭농사에서 논농사로 전환되었으며, 논농사는 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인구 증가, 급속한 사회분화의 촉진 등을 유발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철기시대토기
철기시대는 크게 두시기로 구분된다. B.C 300년경으로부터 서력기원 전후까지 '초기철기시대' 서력기원 전후로부터 A.D 300년경까지의 '원삼국시대'이다. 원삼국시대는 청동기의 제작은 사라지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는 시기이다. 초기철기시대는 청동기 후기와 겹치는 시기이므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형식이 그대로 계속 되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의 전통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 한(漢)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이 받아들여져 보다 단단하고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학계에서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고 부른다>.
원삼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연질 또는 경질의 타날무늬(두둘긴 무늬)회색토기와 적갈색 타날무늬토기이다. 제작환경은 개방된 노천가마가 아니라 밀폐된 실요, 즉 지하굴식 혹은 터널식 오름가마이다.
이와 같은 제작 환경은 산소의 공급이 차단된 환원염(還元焰) 상태이고 밀폐된 공간이므로 소성온도를 전보다 올릴 수 있어 어떤 것은 쇠붙이 소리가 날 정도의 상태를 보이는 것이 있으니 토기의 일대 혁명이라 볼 수 있다.
한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은 민무늬토기가 한데가마(노천요 露天窯)에서 굽는 것인데 비해 한나라의 새로운 토기 굽는 기술은 굴가마(등요 登窯)에서 굽는다. 그리고 토기를 만들 때 돌림판(도차 陶車) 위에 흙을 올려놓고 두르림판(박자 拍子)을 사용하여 두드림무늬를 내므로 보다 단단하고 치밀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중서부 지방의 빗살무늬토기
동북지방의 빗살무늬토기
강원도 지방 토기
남부지방 토기
삼국시대 토기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서 고대국가를 형성했던 시기이다. 이 시대의 문화는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토기란 흙을 빚어 구운 모든 기물을 도자기라 말하며 구울 때의 온도에 따라 태토(胎土)의 굳기가 각각 다르다. 굳기에 따라 일반적으로 토기(土器,clay ware), 도기(陶器,earthen ware), 석기(石器, stone ware), 자기(磁器, porcelain)로 구분한다.
토기는 점토질(粘土質)의 태토를 사용하여 섭씨 700 ∼ 800도 정도에서 구운 것을 말하며, 유약을 씌우지 않았고, 표면 색은 적갈색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가 이에 속한다. 도기는 섭씨 800 ∼1000도 정도로 토기보다 약간 높은 온도에서 구워 물이 스며들기는 하나몸이 비교적 단단하다. 대체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가 이에 속한다.
석기는 섭씨 11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소성(燒成)하기 때문에 태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장석이 녹아서 유리질로 변해 태토 사이로 흘러 들어가 그릇의 몸이 매우 단단하며 표면색은 회청색을 띤다. 그러므로 두드리면 쇠붙이 같은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경질(硬質)토기가 곧 그것이다.
자기는 섭씨 1200∼1400도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태토의 유리질 화가 더욱 촉진되어 강도가 매우 높은 그릇을 말하며, 태토로는 고령토를 사용한다. 고령토라 함은 원래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경덕진 부근의 고릉(高陵)에서 고급의 자토(磁土)가 산출되었던 데서 유래했다.
양질의 고령토는 규석 50%, 알누미나 30%, 포타시움 2,5% 등의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석의 유리 질화가 태토의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흙으로 만든 그릇이 자기이다.
이와 같은 고급 자질의 고령토는 내하도가 높아 그릇을 얇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유럽에는 고령토가 없기 때문에 유리질화의 원인이 되는 규석을 대신하여 석고나 골재를 사용하므로 연질의 인공자기가 되는 까닭에 진정한 의미의 경질자기(硬質瓷器)라로는 할 수 없다.
고급 자질의 고령토로 만든 그릇 위에 다시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재벌구이를 하면 그릇의 표면이 골고루 유리화되며, 이러한 자기가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도자기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도자기(陶磁器) 라는 용어는 고려와 조선시대 문헌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자기, 사시, 도기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백자, 백사기 등으로 기록한 점으로 보아 "도자기(陶磁器)"라는 용어는 과거에는 쓰지 않았던 듯하다.
예컨데 조선시대 1424∼1432년 사이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세종실록지리지]의 토산조에는 자기소와 도기소로 구분하여 기재되어 있어서 1420년대에는, 그 기준은 알 수 없으나 자기 또는 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또, 1481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토산조에도 자기, 사기, 도기의 세 가지 용어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15∼16세기에는 자기, 사기, 도기라는 용어는 각각 별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자기 또는 도기로 엄연히 구분하여 사용되던 용어가 지금은 자기와 도기를 합쳐 [도자기(陶磁器)]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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