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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장욱진 회고전을 보고

칡뫼 2024. 1. 23.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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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느 순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말을 시작했다. 말은 이미지를 탄생시켰고
이미지에 이어 문자가 만들어졌다.
이미지나 문자의 특징은 말과 다르게 사라지지 않고 저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고대 알타미라 동굴 벽화나 라스코벽화,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원시미술이나 우리나라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알 수 있겠다.
당시 그림은 동물이 주를 이루고 사냥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언어, 정신을 표현했다 하겠다. 즉 함께 하지 않고는 생존조차 힘들었던 인간의 삶은 원시 시절부터 사회성을 지녔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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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늘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를 고민한다.
여기에서 무엇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일 것이다. '무엇'은 대상인 동시에 작가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해져야 따라오는 것으로 '어떻게'가 있겠다. '어떻게'는 표현 양식으로 현대 미술에서는 그 주목도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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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덕수궁 국현에서 전시중인  장욱진 회고전(가장 진지한 고백)을 보았다. 이번 작품전은 오래전부터 이곳저곳에서 자주 접했던 이미지였지만 그의 작품을 나름 주제랄까 시기별로 정리한 전시라 찾게 되었다. 주제를 '고백'으로 정했는데 첫 번째 고백 제1주제는 '나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이고 두 번째는 '발상과 방법: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
세 번째 '진진묘'. 네 번째는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으로 기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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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작품은 자신 안에 내재된 사유로 주로 표현되는 이미지는 작가 눈앞의 대상물이다. 산이요, 나무요, 집이요, 그리고 해와 달 그곳에 사는 사람, 날아다니는 새, 까치가 주된 기호다. 강아지도 있다.
사회 현상이나 그곳에  존재하는  갈등 역사성 그리고 사변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즉 작품세계를 구축함에 있어 철저히
대상이 갖는 소박한 본질 그들이 서로 연결되며 구성하는 우주관이다.
최소화되고 동화적이며 사물은 단순화된다. 덕분에 그 대상과 대상 사이 빈 공간이 생기는데 그곳이 독자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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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미술이 갖는 힘은 독특
한 화면 구성과 그동안 우리 미술에서 보지 못한 작가만의 조형성을 구축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서사보다는 서정이요 사회보다는 개인이고 외화보다는 내화된 미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69년도에 쓴 (저항, 동아일보)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는데
'나의 경우도 어김없이 저항의 연속이다. 행위[제작과정]에 있어서 유쾌할 수만도 없고 소재를 다룰 때 기교에 있어 재미있게 나왔다 해도 결과[표현]가 비참할 때가 많다. 이렇다 보니 나의 일에 있어서는 저항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ᆢ일상 나는 나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이 저항이야 말로 자신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 썼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적당히 세월이 흐른 1960년대는 세계사적으로 저항의 시대였다. 프랑스에서는 68 혁명이 있었고 체코 프라하의 봄도
있었다. 비틀스가 활동했으며 우리나라는 군사쿠데타와 월남파병이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후 일어난 세계사적인 현상을 목도하고 알았을 화가 장욱진은 시대의 언어였던 저항을 마치 변명처럼 자신의 작업 내면 갈등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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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67년 신동아에 기고한 '예술과 생활'이란 글에서 '자기의 생활은 자기만이 하며~~ 창작생활  이외에는 쓸데없는 부담밖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마치 승려가 속세를 버렸다고 해서 생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과 함께하여 그 뜻을 펴고자 하려는 또 하나의 생활이 지워진 것과 같이 예술도 그렇듯 사는 방식임에 지나지 않으리라.'라고 작가관을 밝혔다.
작품은 철저히 자신과 자신과의 싸움이며 예술은 득도의 경지와 통한다는 삶의 세계다. 즉 사회의 현상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며 조형성을 고민한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이어진 전시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오랜 작업 끝에 이룬 장욱진만의 이미지는 우리 미술의 큰 자산이 됐으며 박수를 받을 만한 성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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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욱진의 회고전을 보고 나니 드는 생각이 있다.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등 당대 최고라 배웠던 대부분의 작가들 작품세계는 왜 하나 같이 '사회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가'이다. 그런 면에서
앞서 기술한 '과연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다시 소환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몸소 겪은 삶에는 일제강점기도 있었고 끔찍한 전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에는 그런 모습이 거의 없다. 커다란 슬픔도 분노도 끔찍한 아픔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림은 결코 우리들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원시 미술이 그랬고 고구려 벽화가 그랬으며 조선시대 풍속화가 그랬다. 과연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굳이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같은 문학인을 소환하고 싶지는 않다. 이 질문이 계속 맴도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나마  힘들게 찾는다면 동시대 작가로 이쾌대가 있겠다. 이쾌대 하니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백자 그림만 잔뜩 걸린 도상봉의 전시를 보고 와서  이쾌대는 “그림은 참 잘 그렸지만, 이런 시절에 어떻게 도자기만 저렇게 그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했단다.


칡뫼 장욱진전 감상 소회


자동차가 있는 풍경
1955년 작
장욱진


자동차가 있는 풍경
1955년 작
장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