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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칡뫼 2025. 1. 19. 12:47


광화문에서 깃발행진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술 한잔 덕인지 깊이 자고 새벽에 눈뜨니 윤석열이 구속되었다. 이어 법원에서 폭도들이 난동을 벌인 일도 큰 뉴스다. 공동체의 최소 약속인 법을 어기면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다. 지옥을 만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벌백계가 답이다.

그나저나 구속되어 수형자가 되면 수의로 갈아입고 수형자 번호를 부여받는다. 앞으로 수감동에서 써야 할 본명보다 앞서는 새 이름이다. 참고로 전두환은 3124, 박근혜는 503, 이명박은 716이란 수인번호를 달고 살았다.
나도 한 때 수인번호를 부여받은 적이 있다. 그 번호는 257번이었다.


< 멋모르고 저지른 죄였다. 가슴이 답답할 때 글을 썼다.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할 글을 이 동네 저 동네 뿌린 게 화근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체포되어 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맞춤법을 어기고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 거기에 수준 낮은 사유와 자기 자랑 투의 어법, 세상고민은 혼자 다 한 듯한 넋두리 등. 죄목이 수두룩했다. 현행범이라 영장도 없었다.

    이상한 감옥이었다. 육체적 구속은 물론 정해진 형량도 없었다. 자율이란 크고 높은 벽이 둘러져 있을 뿐. 수감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선지 감옥 생활을 즐긴다고나 할까.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도 누구나 출소를 염원했다. 출소란 글로 세상을 주유하는 것이었다. 결국 어느 수준의 글 실력이 필요했는데 타인의 혹독한 평가와 냉정한 자기 검열이 따랐다. 들어오긴 쉬어도 나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감옥생활은 생각보다 자유로웠다. 사회적응을 위해 글을 써내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안 한다고 뭐라는 사람은 없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반성문처럼 쓰거나 주변의 일을 적당히 기록하며 지냈다. 실은 그게 문제였다. 세상 일이 그러하듯 대충 하다 보니 글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만큼 형기가 늘어났는데 이것이 무서운 벌이었다.

   빠른 출소를 위해 수감자들은 일주일 혹은 한두 달에 한 번 모여 그동안 쓴 글을 서로 평가했다. 글 기본이 되어있지 않으면 면박을 받거나 싸늘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미소 띤 얼굴에 예의를 갖춰 점잖게 지적하지만 평가는 냉혹했다.

고치고 또 고쳐 썼다. 구성을 바꾸기도 하고 수식어, 조사, 부사, 맞춤법에 띄어쓰기까지. 200번은 넘지 싶었다. 그 덕인지 그리 나쁜 평가를 받진 않았다. 몇 차례나 고쳤냐는 말에 언 듯 257번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 일로 나는 ‘이오칠’이란 별명을 얻었다. 별명은 '열심'이라는 의미로 다가왔고 싫지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 257번 수인이 되었다.

    글 감옥은 거대해서 다른 곳에도 수감자들이 많았다. 우리 ‘수필’동 근처에 ‘시’ 동이 있는데 그곳 수감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긴 수염에 꽁지머리를 한 그는 주로 독방에 갇혀 있었는데 대화나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지 그의 시는 선문답처럼 어려웠다. 우리 뒤쪽에 있는 ‘소설’ 동에는 주로 어설픈 거짓말 때문에 갇힌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  중략

  칡뫼 화문집 <고양이처럼 출근하기 >  57 페이지에 수록된 '수인 257번'이란 글 중에서.

그나저나 윤석열이는 어떤 수를 가슴에 새길까? 그것이 궁금하다.
역사에 기록될 번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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