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해야 사는 남자
김형구
종합병원은 언제나 만원이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 진료카드를 들고 의사를 찾아 나선 사람,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 음료수 상자를 든 면회객, 링거액 거치대를 밀며 이동하는 환자. 복도며 계단, 엘리베이터까지도 출근길 지하철처럼 붐볐다. 저 많은 사람이 모두 아픈 일과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긴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살다보면 말짱한 게 이상한 일이다.
작년 말, 술자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찌감치 자리를 편 동창회를 시작으로 각종 친목 모임, 그리고 많은 친구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나는 결국 술에 절어 살았다.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거나 겨우 타고도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졸다가도 내릴 곳이 되면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던 몸이었다. 나이 탓일까. 너무 팽팽하게 긴장하면서 산 세월에 대한 반발일까. 이젠 탄력 잃은 스프링을 닮았다. 그러게 술은 왜 마시냐고 묻지만 남자들 술 마시는 이유에는 답이 없다. 답이 너무 많으면 답이 아니다. 강행군 탓인지 뱃속이 수상했다.
진료안내서에 적힌 순서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건강검진을 겸하고 있어 검사실을 전전하다 마침내 대장내시경 전문병동 제3내과에서 걸음을 멈췄다. 탈의실에서 엉덩이 부분이 둥글게 뚫린 옷으로 갈아입고 순서를 기다렸다. 멍한 표정의 중년사내가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무죽죽한 얼굴에 동공이 풀린 것이 영락없이 한 잔 했을 때 모습이다. 비틀거리며 내 앞으로 쓰러지는 걸 가까스로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회복실에서 방금 나온 환자였다.
“속이 안 조아 내시갱 보고 난는데, 거 디게 어지럽네."
혀 꼬인 말을 하더니 쉬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마취약을 못이기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잦은 음주로 속이 허해졌나보다. 문득 9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서른에 가정을 꾸린 나는 열심히 산 덕인지 나름 조그만 사업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경기가 얼어붙자 하던 일이 빚을 남긴 채 무너졌다. 마흔 즈음이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했다. 한 푼이 아쉬운 나에게 휴일은 사치였다.
새벽출근에 늦은 퇴근, 외줄타기처럼 십여 년을 버텼다. 부족한 수면과 체력의 한계, 심적인 중압감으로 몸은 자꾸 말라만 갔다. 잦은 설사와 변비. 병원을 찾았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뱃속을 청소하고 다시 찾은 병원에서는 마취주사를 맞은 기억뿐이었다. 그동안 맺혔던 응어리였을까. 커다란 용종 세 개를 떼어낸 나는 회복실에서 깨어난 후 다시 쓰러졌다. 겨우 일어나 탈의실을 찾았을 때에는 창밖에 어둠이 내려 있었다.
남자는 태생적으로 사냥꾼이다. 뭐든 잡아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사냥은 쉽지 않아 늘 배가 고프다. 배고픈 사냥꾼은 이런 저런 이유로 술을 찾는다. 능력이 부족한 것을 탓하기도 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며 따르지 않는 운 핑계도 댄다. 어쩜 사내들에게 술은 사냥을 위한 제주인지도 모른다. 내일의 사냥을 위해 한 잔, 결과에 한 잔. 그래서일까. 술꾼에게 축배와 고배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쉬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가의 잔주름, 햇볕에 그을린 목덜미, 삐죽삐죽 비집고 나오는 흰 머리카락. 동굴 같은 건물 속에 있기보다는 나처럼 들로 산으로 사냥을 다닌 모습이다. 힘든 사냥 때문이리라. 지쳐 보였다. 남자가 겨우 몸을 추스르더니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문밖에서 아내인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살려면 술 좀 작작 먹어요. 작작!”
"알았다카이. 내 이제 끈는다. 끄너! "
어쩜 저렇게 사내들은 한결같은 대답을 할까. 그래 끊어보자. 아니 줄여보자.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받은 강박을 술술 녹여주는 술의 마력을 알아버린 사내들에게 이 말은 공염불이지 싶다.
내 차례인가보다.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검사를 마친 후 약에 취해 있던 나도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진료실을 찾았다. 의사는 크기가 4미리 정도 되는 용종 여섯 개를 처리했다며 뱃속 동영상을 보여줬다. 전에 비해 크기는 작았지만 수는 더 늘어나 있었다. 마치 내 고단한 삶의 투시도를 보는 듯 했다.
마취약 덕분에 죽음의 요소를 찾아내고 제거도 했으니 이래저래 남자는 취해야 사는 모양이다.
<2015년 수필과 비평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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