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다음 날
김형구
불자는 아니지만 가끔 조계사를 찾는다.
인사동 근처.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다. 점심 때 먹은 짜장면 때문인지 커피가 마시고 싶다. 전문점 커피는 비싼 데다 부산한 실내도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들고 다니며 마시는 커피는 시간을 녹여내는 맛이 없어 싫다. 트인 공간, 나무 그늘에 앉아 맛보던 경내 카페 ‘가피’의 1000원짜리 커피가 생각난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연등이 하늘을 덮고 있다.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사과가 있어 사과 맛을 알듯 부처님이 오셔서 비로소 부처를 안다. 어쩜 태어난다는 것은 세상과 대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맞장 뜨다 지친 영혼들일까. 분홍, 노랑, 빨강. 녹색, 색색으로 멍든 가슴마다 꼬리표가 달려 있다. 염원이 담겨서인가 등이 무거워 보인다. 주렁주렁 연등이 매달린 줄을 커다란 적송 몇 그루가 힘차게 당기고 있다. 붉고 굵은 몸통이 흡사 사천왕이다.
카페 ‘가피’는 문이 닫혀 있다. 세상은 늘 그렇다. 원하는 것은 기다려주는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커피자판기가 보인다. 1000원짜리 지폐를 넣자 종류별로 불이 들어온다. 달달한 밀크커피를 고른다. 희부연 갈색 액체. 반환 레버를 돌리자 500원짜리 한 개와 1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 나온다. 커피 한 잔에 동전이 세 닢. 하나로 넷을 얻는다. 못난 중생에겐 이런 것도 부처님의 가피 같다. 그래서 살만하다.
나무벤치에 앉는다. 대웅전 열린 문사이로 커다란 부처님 모습이 보이고 마당에는 몇몇 불자들이 합장으로 예를 올리고 있다. 가부좌를 한 부처님 무릎 앞에 보살 한 분이 승복을 입고 서 있다. 등이 굽은 늙은 보살은 옷고름을 여미더니 무너져 내리는 꽃잎처럼 풀썩 주저앉는다. 지친 몸을 부처님에게 맡기니 편안해 진 것일까? 안식이다. 적멸이다.
만수향이 그윽하다.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사람들이 머물러 있다. 생각에 잠긴 사람. 소곤소곤 전화를 하는 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있는 연인. 몇몇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등 사이로 싱그러운 하늘이 보인다. 화창한 햇살. 부드러운 바람결. 어제의 번잡을 벗어나 모든 인연이 평화롭다. 커피를 마신다. 읽으려던 시집을 조용히 덮는다. 무념이다. 무상이다. 공이다. 잠깐 부처가 된다.
<2015년 에세이문학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