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연작

ㅡㅡ가을 전시를 앞두고

칡뫼 2024. 9. 20. 14:09


     거의 2년에 한 번 하다시피 한 전시가 다시 이번 늦가을(나무아트 11월 13일부터)에 열린다.
나름 책도 읽어보고 이런저런 강의도 듣고 미술사도 들춰보고 그림 또한 셀 수 없이 봐왔어도 아직 그림이 뭔지 모르는 1인이다. 해서 전시는 늘 두렵다. 하지만 전시로 인해 또 다른 사유로 다시 한걸음 나아갈 수 있기에 힘을 들여 치른다.

    어린 시절 담벼락이나 땅바닥에 낙서하다 학교 입학 후 우리 집 소를 그렸던 기억이 있다. 크기도 컸지만 그 모습이 늠름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집 누구나 아끼고 사랑했던 대상이기에 그렸던 것 같다.
서울로 전학 와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따라 그렸다. 왜 미美술인가. 그림은 무조건 아름다운 것을 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 더 머리가 커지니 이쁜 경치나 감동을 주는 풍광도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아름다운 풍경은 거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에게 삶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사정권하에서 생활은 답답하고 가난했으며 길에선 최루탄이 난무했다. 낚싯배를 그리거나 장미꽃만 그리던 화가들이 가짜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은 세상과 유리된 장식물인가? 거짓의 손장난인가? 치기어린 사유였다. 결국 내가 처한 현실이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답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에는 여러 눈이 있고 자기가 아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 결국 화가 아닌가. 즉 변화하는 세상과 변하는 작가의 사유. 그 둘이 부딪치는 부분이 작품일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가짜다 형편없다 칭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세상에 드러난 표상은 허상이다. 진실은 늘 거죽 속에 숨어 있다. 결국 나는 내가 사는 현재를 그리기로 한다. 지금 마음속에 드러난 풍경을 그린다. 내 마음에 보이는 경치가 되려 발 딛고 있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생각 또한 미술의 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것을 더 깊이 알아내고 그려낼 능력이 안된다. 내 사유, 정보, 지식 그리고 재능의 한계다.

    그림은 시작부터 말이었다. 소통의 도구였던 말은 뱉으면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런 말을 붙잡아 놓은 것이 그림이다. 말을 엮어놓은 이야기다. 내가 바라 본 세상 이야기를 그리려는 이유다. 말하는 순간이 지금인 것처럼 나의 그림도 현재의 나일뿐이다.

요즘 내가 본 세상은 황무지다.
우상을 숭배하는 우상의 벌판이다.



황무지, 우상의 벌판
칡뫼김구 개인전
2024년 11월 13일~11월 26일까지
후원 서울문화재단
인사동 나무아트


우상의 벌판
324 ×130.3cm
한지 먹 채색
칡뫼 김구

'황무지 연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24.09.27
칼의 나라  (4) 2024.09.27
십자가의 죽음  (0) 2024.09.27
서탑書塔의 나라  (2) 202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