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좋을 듯 싶어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칡뫼 2012. 9. 27. 11:00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윤오영

 

 옛 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가 없기로 난을 그렸다, 아리따운 여인의 빙옥 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 없으므로 매화를 그렸던 것이다. 붓에 먹을 듬뿍 찍어 한 폭 대〔竹〕를 그리면, 늠름한 장부, 불굴의 기개가 서릿발 같고, 다시 붓을 바꾸어 한 폭을 그리면 소슬한 바람이 상강(湘江)의 넋을 실어오는 듯했다. 갈대를 그리면 가을이 오고, 돌을 그리면 고박(古樸)한 음향이 그윽하니, 신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예술인 것이다.

 

 종이 위에 그린 풀잎에서 어떻게 향기를 맡으며, 먹으로 그린 돌에서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것이 심안(心眼)이다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음(知音)인 백아가 있고 종자기가 있는 것 아닌가. 이 뜻을 알면 글을 쓰고 글을 읽을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의 공민(共憫)이요, 사회의 공분(共憤)이요, 인생의 공명(共鳴)인 것이다.

 

 문인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기를 즐겨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片貌)와 생활의 정회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속악(俗惡)한 시정잡사도 때로는 꺼리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생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여기서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다 글이 되는 것이다.

 

 의지가 강한 남아는 과묵한 속에 정열이 넘치고, 사랑이 깊은 여인은 밤새도록 하소연할 만한 사연도 만나서는 말이 적으니, 진실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장황하고 산만할 수가 없다. 말은 끝났는데 뜻은 다하지 않는 여운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깊은 못 위에 연꽃과 같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도, 물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물 밑의 흙과 같은 넓은 바닥이 있어 글의 배경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음미에 음미를 거듭할 맛이 난다. 그리고 멀수록 맑은 향기가 은은히 퍼지는, 한 송이 뚜렷한 연꽃이 다시 우아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글이 쓰고 싶고, 이런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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