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에서 만난 수화 김환기 근원 김용준 그리고 변월룡
미술 작품에 큰 감동을 받으면 자연스레 작가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나 그 시절 주변의 인물들도 찾아보게 되는데요.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감동의 폭도 넓어지죠.
제 나이 20대 초였던 70년대 후반이지 싶습니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현대 작가를 망라한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때 수화 김환기 선생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처음 만났습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었는데 커다란 화폭에 빈틈없이 점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하늘의 별이 촘촘히 엮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인연의 고리 같은 느낌도 있었죠. 당시 감수성이 풍부한 젊은이여서일까요. 순간 황홀해서 뭐랄까 잠시 중력을 놓친 기분이었죠. 자세히 보니 점 주위를 네모난 선이 감싸고 있었는데 진하거나 엷거나 하며 화폭에 스며있었죠. 마치 생명의 원초적 모습이랄까. 볼수록 빠져드는 푸른색과 명멸하듯 끝없이 이어져 있는 점이 주는 무한한 확장성, 우주의 이야기가 펼쳐진 듯 보이는 아름다움에 행복했습니다.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함께 전시되었던 다른 작품을 보고 나오다 다시 되돌아가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 특별한 감흥을 못 느꼈던 비구상회화에서 처음으로 충격적인 감동을 맛본 날이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사실 이런 경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림은 봐도 모르겠고 특별한 감동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이 말은 그림과 보는 사람이 공감대가 없다는 이야기일 텐데요. ‘나만 그런 것인가’ ‘난 그림을 몰라’ 하며 좌절감에 젖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술사나 이론 서적을 보기도 하고 미술 평론을 찾아 읽기도 하죠. 그렇다고 크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결국 보는 예술이니 많이 보고 그 느낌을 나름대로 적립해 놓아야 안목이 넓어지는 게 맞을 겁니다.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자주 찾게 되는 이유이고요.
수화선생은 외국 생활을 하기 전 성북동 노시산방에 사셨는데 이 집의 원래 주인이 바로 <근원수필>의 저자 김용준 선생이셨습니다. 근원 선생은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귀국 후에도 조선화의 부활을 위해 애쓰신분입니다. 노시산방의 유래는 <근원수필> ‘노시산방기’에 잘 나와 있는데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 한 것은 3,4년 전에 이 군이 지어 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7,80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2,3주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주고 하는 것이 … -근원수필 ,노시산방기 중에서-
여기서 이 군은 우리가 잘 아는 <무서록>의 저자 상허 이태준 선생을 말합니다. 소설가 상허 이태준은 근원과 친구사이로 성북동 수연산방의 주인이었죠. 그 뒤 근원선생은 의정부로 이사를 하는데 그때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 소회를 근원수필<육장후기>에 적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육은 팔았다는 뜻이니 집을 넘긴 후 이야기를 적은 글이죠.
‘좋은 친구 수화에게 노시산방을 맡긴 서울로 올라온 뒤로 한번은 노시산방의 새 주인인 수화를 만났더니 그의 말이 ‘노시 산방을 4만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기고 보니’ 나에게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수화는 가끔 나에게 돈도 쓰라고 집어 주고 그가 사랑하는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고 하는 것이다. -육장후기 중에서-
결국 근원은 그림 잘 그리는 후배 화가를 위해 집을 값싸게 물려줬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1944년 노시산방을 넘겨받은 수화는 산방 이름을 ‘수향산방’으로 바꿨습니다. 자신의 호 수화의 ‘수’자와 수필가인 부인 이름 김향안의 ‘향’자를 합한 것이죠. 1956년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항아리, 새, 산, 달 등 한국적 소재에 대한 미적 탐색을 심화시켜 나갔지요. 부인 김향안은 본명이 변동림으로 이상과 결혼했으나 이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수화선생과 결혼한 수필가이며 화가에 미술평론가였습니다. 경기 의정부로 이사한 근원은 수시로 수향산방을 찾아 김환기와 미술을 논하곤 했는데 그때 그린 그림 <수향산방전경><수화소노인가부좌상>등이 남아있습니다.
김환기 김향안 부부
근원은 '육장후기' 마무리에 노시산방이 사라진 아쉬움을 토로하지만 수화라는 한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며 위안을 삼습니다.
30여년이란 시간이 흘러 2010년이었습니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아시아 리얼리즘>전이 열렸습니다. 당시 저는 그림 외에도 수필에 관심을 기지고 있던 때라 <근원수필>과 <무서록>을 읽고 있었는데 전시장에서 반가운 그림을 만났습니다. 다름 아닌 근원 김용준 선생의 초상화였는데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림의 원화를 만난 것이죠,
동그란 안경을 쓴 근원선생이 동양화 한 폭을 양손에 들고 찬찬히 훑어보는 그림이었는데 근원선생을 친견한 듯 커다란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거침없는 붓질, 과감한 생략, 치밀한 묘사 속에 살아난 인물의 생생함이 돋보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많은 인물화와 기록화, 위인들의 영정을 보아온 저에게 살아 있는 인물화를 봤다할까요. 신선했습니다. 그동안 보아왔던 인물화는 카메라를 의식한 인물사진 같다고나 할까요. 딱딱한 분위기였죠. 그런데 근원선생 초상은 분명 깊이와 어법이 달랐습니다. 근원초상을 그린 분은 그동안 이름만 들어왔던 변월룡이란 분이었는데 그는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란 고려인 화가였습니다. 결국 사회주의 미술을 인물화를 통해 만난 셈이죠.
근원 김용준 초상 변월룡
그럼 왜 변월룡 화백은 근원선생의 초상을 그렸을까요. 근원선생은 6.25전쟁 중(인민군 치하)에 서울대 예술대학 임시학장을 했던 관계로 월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근원수필>에서 보았다시피 좌익사상이나 특별히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았던 그가 월북한 것은 지금도 연구할 대상입니다. 서울수복 후 부역죄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북에서도 평양미술대에서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근원은 늘 조선 미술의 부흥을 염두에 둔 화가였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보다는 주로 서화협회전에 그림을 출품했던 분이죠. 민족적인 생각이 투철했고 그 점은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다시 한국화로 화풍을 바꾼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춤 1958년 김용준 작
변월룡 화백은 고려인으론 처음 그림의 천재성을 인정받아 소련의 루핀 미술대학에 들어가 교수까지 지낸 분입니다. 사실 동양인이 교수가 된 것은 실력 말고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죠. 그의 작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수였으며 탁월한 표현력은 러시아에서도 지금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이념을 널리 알리는 도구로 예술을 활용했는데 그때 평양으로 파견된 화가였죠. 거기서 근원선생과 조우합니다. 한국인으로 교감도 컸지만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근원선생은 민족주의 경향이 있어 한국화의 부활을 생각했고 변 화백 역시 어려서 배운 붓글씨 등을 통해 한국화에 대한 애정이 있던 상태였죠. 그 점은 그의 그림에서도 엿보이는데 여백처럼 생략하는 화면구성이나 특히 소나무 그림은 동양화 풍이죠. 짧은 평양 체류기간이었지만 둘은 무척 깊은 사이가 된 듯합니다. 이점은 서로 주고받은 편지나 그림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의 북한미술의 토대가 변월룡 화백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때 그린 그림이 근원 선생의 초상화인 거죠. 저는 2010년 이 그림을 본 감동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시 이 작품을 만나게 됩니다.
올 봄인데요.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변월룡전 (2016년 3월에서 5월까지)이었죠. 여기서 변화백의 그림을 망라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전시는 사실 몇 년 전 기획되었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취소되었다가 열린 전시였습니다. 전시에서 변화백의 작품세계와 우리민족 민초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전쟁 후 북쪽에서 바라본 조국 산하의 모습은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사실적인 기법을 중시한 사회주의 회화는 한편 그림을 이해하기도 쉽지만 그 주변 상황을 사진처럼 기록해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특히 근원선생 초상과 함께 북으로 간 문화계 인사들의 초상을 보게 되었는데 모두 화폭 속에 살아있었습니다.
무용가 최승희 초상
평양 대동문 변월룡작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분단현실은 많은 것을 잃고 잊게 만들었습니다. 사상적으로 갈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편이 갈려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체 살아온 세월이 자꾸 길어집니다. 전시를 보면서 문화예술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창구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 증거로 얼마 전 해금되어 우리 눈앞에 펼쳐진 글, 그림, 노래는 우리가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0여년에 걸쳐 만난 3건의 전시회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난 셈이 됐습니다. 북으로 간 수필가이자 화가인 근원 김용준, 소설가 상허 이태준, 남에서 활동하다 결국 파리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던 화가 김환기, 부인 김향안. 그리고 연해주에서 태어나 평소 그리워하던 조국강산을 앞에 두고도 북에서 버림받고 남에서는 잊혔던 화가 변월용. 모두 역사의 격랑 속을 헤쳐 나온 분들이죠.
전시회에서 만난 그림들은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진짜 가치는 아름다운 겉모습이 아니라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 그 시절을 살아낸 우리 민초들의 숨소리 일지도 모릅니다.
-칡뫼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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