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을 태우며 / 장현심
놀이 중에 불놀이만큼 재미있는 게 또 있을까. 모닥불은 비 오는 날만 아니라면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피울 수 있고, 또 누구나 좋아한다. 내가 이곳 치악산 자락에 산 지 올해로 십사 년째인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지난여름은 '더위에 어떻게 사느냐'가 안부 인사였지만 산 속이라 그런지 나는 더운 줄 모르고 지냈다. 오히려 밤에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런 곳에 살아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지인들이 놀러오면 으레 밤에 불을 피웠다.
불 피우기는 손님들을 위한 이벤트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녁에 등나무 밑에서 치악산 막걸리를 곁들인 바비큐가 끝나면 나는 늘 하는 대로 남은 불씨에 마른 나무를 던져 넣는다.
태울 나무는 주변에 널렸다. 죽은 낙엽송 가지들이 많지만 그걸 만졌다간 손에 가시가 박혀 애를 먹는다. 태풍에 쓰러지거나 설해 입은 나무를 산에서 끌어내려 가져오는 게 좋다. 옮기기가 만만치 않은데 , 놀러온 사람들이 퇴화된 근육을 혹사시키며 비지땀을 쏟을수록 모두의 만족도가 높다. 목도를 하여 마당에 부려놓고는 사슴이나 곰을 잡아온 수렵인들처럼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즐겁다.
발로 밟아 부러지는 나무 가지들은 그대로 쌓고, 굵은 부분은 따로 손을 보아야 한다. 도끼를 내오면 대부분 뒤로 물러서는데, 객기를 부리느라 자루를 거머쥐고 달려든 이도 몇 번 휘두르다 내려놓고 만다. 결국 톱으로 도막을 치게 된다.
며칠 전에는 이곳에 와서 사귄 토박이가 놀러 왔다가 나무 광을 채워놓고 갔다. 수북이 패놓은 장작을 보니 갈걷이가 끝나 곳간을 채운 농부의 심정이 어렇겠구나 싶었다. 오십 줄에 든 이가 도끼질을 그토록 경쾌하게 하다니 드문 일이었다.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모탕에 놓인 통나무의 결을 내려치면, 윷가락이 맨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로 나무가 쪼개지며 떨어진다. 그걸 다시 모탕에 엎어놓고 반으로 쪼개고, 또 쪼개고…그 동작이 얼마나 단순하고 기볍고 절도가 있는지, 마치 기계체조 선수의 리드미컬한 몸동작이 느껴진다.
불을 피우기엔 밤이 제격이다. 낮에 피운다고 안 될 것은 없지만 불꽃의 온전한 모습은 밤에라야 더 선명히 드러난다.그것을 응시하고 있으면 굳이 말이 필요 없다. 찌를 보고 있는 낚시꾼이 윤슬에 혼이 빠지듯 불꽃도 사람의 얼을 빼놓는 것 같다. 시간을 앞으로도 가게하고 뒤로도, 혹은 제 자리에 머물게도 한다. 널름거리는 불길에 시선이 사로잡히면 알 수 없는 행성에 간듯 시간의 개념조차 없어지고 만다. 자정을 넘기기 일쑤고 나무를 조절해 불길을 사그라뜨려야 놀이가 끝난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나무도 타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모닥불 장작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상수리나무와 소나무다. 탈 때 내뿜는 향도 좋고 화력도 세다. 하지만 획일화된 사회처럼, 아니 조연 없는 주연 같아 재미가 덜하다. 꼭 잔가지를 넣어야 한다. 놀이 삼아 피우는 불은 타닥타닥 소리가 나고 자잘한 불티도 날려야 제 맛이다. 타는 소리, 연기냄새, 불꽃의 모양, 잉걸덩이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져야 아름답다.
오래 타기는 아까시나무를 따를 게 없다. 단점이 있다면 탈 때 구린내가 난다는 점이다. 방귀 냄새에 신경 쓰는 조심스러운 연인들이라면 그 불 앞에 서는 걸 삼가야지 싶다. 오래 타는 것으로 박달나무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불꽃은 너울너울 혀로 제 몸을 어루만지듯 같은 곳을 핥다가 지나가고, 다시 돌아와 스치기를 반복한다. 노련한 피아니스트가 현란한 변주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
그런 나무는 불꽃이 스러지고 잉걸이 심하게 남는다. 불놀이가 끝날 때 뚜껑을 덮어 놓았다가 다음날 열어보면 쇳소리가 날 정도의 짱짱한 숱으로 변해 있다. 습기가 들어가지 않게 간수해 두면 다른 날 바비큐 숯으로 제몫을 톡톡히 해낸다.
밤나무도 쓸 만하다. 불이 맹렬히 타오를 때는 불티가 반딧불이 마냥 높이 날아오른다. 밤송이 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밤송이의 가시는 불꽃놀이 꽃불 터지듯 호로록 타고 껍짐만 동그란 불공으로 남는다. 그 모습에 취해 넋을 놓았다가는 진짜로 취할 수 있다. 밤나무 불길에는 독서이 있어 사람이 어이기 쉽디다.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밤나무는 삼가야 한다.
불놀이용으로 쓸모가 없는 건 은행나무다. 잔가지는 좀 나은데 굵은 나무는 정말 제 구실을 못한다. 불땀도 좋지 않고 피식피식 마지못해 불이 붙었다가 불길이 안으로 숨어버린다. 불이 당긴 줄 알고 나무를 얹지 않았다가 불꺼뜨리기 십상이다. 방화 목으로 은행나무를 심는 게 이해가 간다.
은행나무의 노란 잎은 가을의 대명사이지 않던가. 식용으로, 약용으로, 재목으로 정말 유용한 나무인데 불놀이용으로는 영 아이다. 생김새도 쑬쑬하고 정직하고 내게 우호적이지만, 이렇다하게 거슬리는 것도 없으면서 재미없고 지루해 단둘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같다고나 할까. 지내봐야 사람 속을 알듯, 나무는 태워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불꽃은 나무의 꿈이었을지 모른다. 타오르는 걸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악산惡山에 뿌리 내리고, 한 뼘 햇빛을 다투어 가지를 뻗고, 손톱으로 우물을 파듯 바위를 녹이는 일이 결코 사람 사는 일보다 쉽지는 않았을 텐데, 갇혀 사는 동물이 들판을 뛰고 싶듯 나무라고 떠나고 싶은 염원이 없었을까.
누구나 이루고 싶은 자기만의 꿈이 있고, 살아보고 싶은 인생이 있지 않던가. 까맣게 잊고 있을지라도 꿈 자체는 언제라도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꿈이란 어떤 계기로든 불이 붙으면 타오르는 나무와 무엇이 다를까. 불길은 현실의 버거움을 무장해제 시키고 스멀스멀 가슴을 헤쳐 밑바닥에 묻혀있는 꿈 씨를 찾아낸다.
사람 사는 게 모두 자기의 나무를 태우는 과정이라면 비약일까. 내게 주어진 삶을 태우는 일, 각자 자기 몫의 나무에 불을 사르며 사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다 타서 마지막 불꽃이 까무룩 꺼지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생을 마치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흔들리는 밤 / 왕린 ramkang2@hanmail.net
약속 장소에 두 남자가 나란히 서 있다. 커다란 카메라를 멘 것만 봐도 ‘산지기’와 ‘무심천’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악수를 청하는 거 보니 그들도 내가 ‘산새’임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들 손에 든 봉지가 궁금하던 차 내 눈의 물음표를 먼저 알아본 산지기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이거요, 치맥입니다.”
무심천이 어깨를 으쓱하며 장단을 맞춘다.
“저는 회를 좀 떴습니다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나는 똑딱이 카메라를 과하게 흔들어 보이며 웃는다.
세 사람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게 된 사이다. 산지기는 근교 산이나 들에서 찍은 사진에 단상을 곁들이고, 무심천은 걷기 여행 중에 만난 맛집 풍경을 소개한다. 눈길 가는 칼럼이나 좋은 수필을 찾아서 올리는 일은 내 차지다.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다 보니 은연중에 가까워졌다. 문학과 사진에 빠져 있고 산을 좋아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더 친밀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공감대를 빌미로 셋이서 한번 만나자는 쪽지를 주고받은 지 오래다. 말만 꺼내 놓고 차일피일하다 여의도 불꽃축제가 있는 날을 디데이로 정했다.
어둑해진 거리, 삼삼오오 짝을 진 사람들이 한강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익숙하지만 어쩐지 서먹한 세 사람도 인파에 휩쓸려 걷는다. 자기 안에서 출렁이는 파고를 가늠하느라 그런지 말이 없다.
얼마쯤 걸어가니 바리케이드를 친 듯 사람들이 멈춰 서 있다. 강변북로가 가로 놓인 곳이다. 달리는 차를 피해 길을 건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차선 하나를 점령한 채 차들이 세워져 있고, 사람들도 군데군데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우리도 빈 곳을 찾아 자리를 편다. 한낮 햇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이 사람들 열기까지 더해서 후끈하다. 산지기가 맥주를 꺼내 놓자 무심천이 페트병 크기를 보고 반색을 한다.
불꽃축제 신호탄에 맞춰 맥주를 따른다. 넘치는 거품, 터지는 불꽃, 환호하는 사람들.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단숨에 잔을 비운다. 빠르게 번져 온몸을 관통하는 어떤 전율. 팽팽하게 쥐고 있는 줄에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걸터앉은 듯 꼿꼿하던 삼각점이 들렁들렁해진다. 꽃불이 하늘 한바닥 환하게 퍼져가는 걸 올려다본 두 남자가 오늘은 사진을 찍지 말아야겠다고 한다. 좋은 사진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 모를 일이다.
산지기가 바닥을 보인 회 접시를 밀쳐놓고 치킨 상자를 풀어놓으며 맥없이 실실거리고, 불꽃 사진의 대가인 양하던 무심천이 거듭 술잔을 비우는 사이 대포알들 줄줄이 하늘을 뚫을 기세다. 슈욱, 소리에 놀란 나는 어떤 감지기에 작동한 듯 벌떡 일어난다.
하늘로 치솟은 불꽃, 파닥파닥 화드득화드득 터지다 멎고 터지다 멎고. 무엇을 그리나 싶으면 형태도 알 수 없는 모양으로 번지다 가물가물 사라진다. 누구의 사무친 그리움이기에 저리 아득한 곳까지 흘러드는지. 수직으로 오르던 불기둥이 그대로 멈춰 꼬리를 흔들다 색색 꽃으로 피어난다. 잠깐 사이 시들어버린 꽃들은 불비가 되어 떨어진다. 보기만 해도 가슴 벅찬 보석 알갱이를 흩뿌려대는 저 마술 지팡이는 누구의 바람일까. 살면서 언제 한번 저토록 불같은 마음을 누구에게 줘본 적 있던가. 저렇게 환하게 피어본 적은 있던가.
나는 사진기자라도 된 듯 복작거리는 사람들 속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려댄다. 불꽃이 터질 때마다 승용차 지붕 위에 올라탄 사람들이 들어오고, 어느 화가의 밤 골목에 등장하는 뒷모습이 무리 지어 잡힌다. 남자 어깨에 목말 탄 여자의 웃음소리가 ‘피콜로’ 소리 같다. 부둥켜안은 남녀 실루엣은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의 화신인가, 멀고 먼 피안의 환영인가.
하늘 꽃에 질세라 세 사람의 말꽃도 돗자리 위에서 흐드러진다. 하늘에서 땅에서 불이 타고 있다고, 나도 한때 불꽃인 적 있다고, 다시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아니 그런 소리 말라고, 아무리 꽃이 좋아도 갈등뿐이던 그 시절 뭔가 아득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밀리는 기분 쓸쓸하고 앞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불안하지만, 헛된 욕망에 눈멀지 않아도 되는 지금, 남은 술의 양만 헤아리면 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엉클어진 말말결에 밤바람 홀로 선뜩해져 옷 속을 파고든다.
하늘 잠잠한 사이, 짚불 사그라진 듯 세 사람도 수굿하다. 무슨 생각에 골똘한지 또 말이 없다. 타닥타닥 타다다닥, 연이어 터지는 폭죽 소리가 침묵을 깨트린다. 자작하던 무심천이 우리도 잔이나 부딪치자고 술을 따른다. 목구멍 알싸하고 발끝 찌르르하건만 내 잔은 또 거품이 그득하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건배!”
잔이 흔들린다. 아슴아슴한 눈에 세상이 흔들린다. 흔들릴수록 마음의 꼭짓점을 움켜쥐고 딱 그만큼의 각을 유지하고 앉아 흔들림을 즐긴다.
피날레 불꽃이 온 하늘을 수놓는다. 가슴에 타는 불이 하늘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금방 사그라질 꽃이라서 더 찬란한, 형체 없이 사라질 꽃이라서 더 흔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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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글을 읽고
에세이피아 겨울호에서 /칡뫼 김형구
매달 집으로 달려오는 책이 꽤 됩니다. 여러 권의 수필집, 미술잡지 그리고 전시 리플렛을 비롯해 가끔 읽겠다고 주문한 책까지. 물론 제대로 읽지 못하죠. 괜스레 바쁘고 그림 그리고 돌아와 읽어야지 하다가도 전화기 속에 빠져 페이스북에 답글 걸고 카카오톡 확인하고 지쳐 이내 잠들곤 합니다.
오랜만에 앉아 에세이피아를 열어봤네요. 다행이 책이 얇아 부담이 없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전 두 작품에 눈이 갔습니다. 원주에 사시는 장현심 선생님의 ‘모닥불을 피우며’와 왕린 씨의 작품 ‘흔들리는 밤’이었습니다. 둘 다 불꽃에 대한 글이어서 읽고 나니 할 말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장현심 작가의 글은 산중생활에서 모닥불을 가까이 하며 생활 속에서 느낀 단상을 녹여낸 수작이었고요. 왕린 선생의 작품은 인터넷 카페에서 사귄 남자들과 여의도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가서 느낀 마음을 그려낸 작품이었네요.
‘모닥불을 피우며’는 역시 장현심 작가다운 글이었네요. 그동안 봐 왔던 작품처럼 내공이 보이고 짜임새가 확실한 교과서 같은 수필 한 편 이었습니다. 빈틈이 별로 없고 구성 또한 정확한 글입니다. 산중에서 살며 모닥불을 피우게 된 사연과 나무타는 모습을 잘 그려낸 뛰어난 작품이었네요. 작가라면 누구나 사물에 대해 깊이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이 글에서도 느끼게 합니다. 감동은 깊이에서 나오는 필연의 결과니까요. 수필작가들이 배워야할 점일 겁니다.
자연스런 도입부와 모닥불의 재료인 상수리, 소나무, 아까시나무, 박달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등의 불에 타는 모습으로 사람과 삶을 비유한 글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작가의 글 수련이 깊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꽃이 까무륵 꺼지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생을 마치는 사람을 보는 듯 하다라며 결미를 짓습니다. 수필이 성찰의 문학임을 증명해 줍니다.
왕린 작가의 작품으로 가보죠. 제목에서 보듯이 '흔들리는 밤'은 일단 글속에 작가가 녹여내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줍니다. 중년의 두 남자와 한 여자. 가상의 공간에서는 가깝지만 결코 만난 적도 없던 세 사람이 약속을 하고 만났습니다. 그곳에 불꽃놀이가 있었죠. 낯선 만남에 대한 서먹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잘 그려낸 글입니다. 사진작가들이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나 순간 침묵이 흐른다던지 쓸데없이 맥주잔에 신경을 돌리거나. 그리고 작가는 글을 끌고 가다가 정점에 이르러 반문합니다. 언제 불꽃처럼 환해 본 적 있느냐 언제 저렇게 불같은 마음을 상대에게 줘 본적 있느냐고.
그러면서도 작가는 다시 말합니다. '흔들릴수록 마음의 꼭짓점을 움켜쥐고 딱 그만큼의 각을 유지하고 앉아 흔들림을 즐긴다.'라고. 자신의 현재에 대한 자리매김이죠. 결미에 이르러서는 불꽃놀이를 본 마지막 사유로 형체 없이 사라질 꽃이라서 더 흔들리는. 그게 인생이라고. 인생이 아니겠냐고 반문하죠. 여운있는 글입니다.
두 작가의 글은 불꽃을 소재로 다뤘지만 맛이 틀립니다. 수준 또한 높았고요. 좋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수필의 현주소를 보는 듯도 했습니다. 아쉽다면 전작은 알게 모르게 교과서 적인 냄새와 방정식을 잘 푼 모범답안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요. 후작은 어딘지 넘고 싶지만 넘지 않고 지킨 몸 사린 표현이 글의 찐한 감동을 도리어 제어한 맛이 있습니다. 삶은 언제나 미완성이듯 글 또한 그럴 겁니다. 두 글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을 어찌 표현 하는 게 좋을 까.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필이 참 솔직한 고백의 글이지만 실제 자신을 얼마나 투영하는 글을 쓰는가. 살짝 숨어서 나를 잘 보여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수필의 어려움일 겁니다. 소설은 허구라는 장치로 숨을 수 있어서 역설적으로 자기의 진면목을 끔찍하게 드러내는데 정작 우리는 그러한가. 찐한 감동은 어디에서 올까. 잔잔한 감동과 진한 감동의 차이는 뭘까.
불꽃처럼 사라질 인생 여러분 불은 얼마만큼 타고있나요. 새해에는 더욱 화려하게 활활 타오르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불꽃이 남긴 잉걸처럼 오래도록 뜨거움을 남겼으면 합니다.
부끄럽지만 독자로서 한마디 적었습니다. 새해 인사에 대신합니다. 복 많이 지으세요. 감사합니다.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 칡뫼 김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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