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수필을 읽읍시다 .
“어둠이 내리면 수필을 읽는다. 한사람의 생애를 엿보는 시간 우울함과 외로움은 잊고 만다 ”
By 이상렬 기자 2015.06.12

이상렬
수필가·목사
어둠이 엷게 내리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미세한 우울이다.
싫지는 않지만 유쾌하지도 않다.
이 순간 나는 수필을 읽는다.
읽는 동안은 연민이나 외로움에 빠질 틈이 없다.
그건 사람을 마주한 자리에서 예의가 아니다.
‘수필읽기’는 곧 ‘사람읽기’이기 때문이다.
한편의 수필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다.
이것은 수필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수필은 자기 고백의 성격이 강하다.
작가가 뒤에 숨어 화자를 대리인으로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독자에게 직접 자기 이야기를 한다.
즉, 수필의 화자인 ‘나’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다.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와 일대일로 직접 대면한다는 뜻이다.
이런 민 낯의 매력 때문에 나는 수필을 읽는다.
문학평론가 김종완의 말이다.
‘독자가 작가의 권위를 침범할 수 없는 영역에 수필이 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직접 경험한 내 이야기가 문학성을 띄고 찬란하게 변신한 것이 수필이다.
직접 경험한 영역에 어찌 가상의 그림자가 얼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수필은 선명하고 명쾌하다.
넋 놓고 읽다간 깜짝 놀란다.
글 속에 작가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허구가 아닌 사실을 다루기에 그렇다.
한때, 세상의 모든 가장자리가 좋았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세계를 내 안으로 함몰시켰다.
현실과 절연하면 할수록 나 홀로 누리는 골방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허나, 언제부턴가 서서히 밀실의 한계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 안위의 진공 속에서 고독의 향락을 누리는 동안, 나보다 더 아픈 이들의 간곡한 곡비(曲庇)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쯤 기가 막힌 또 다른 도피성을 찾았다.
숨어서도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리, 자아를 세계화할 수 있는 곳, 골방에 갇혀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곳, 바로 수필이었다.
내가 만났던 수필 몇 편을 소개한다.
교과서를 통해 수필과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난생 처음 ‘읽는 감동’ 이 무엇인지 알았다.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최초로 하게 했던 수필이다.
구두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걷는 작가와 불안감을 느끼며 앞서가는 여자 사이에 긴박한 심리묘사를 재치 있게 그려 낸 계용묵의 <구두>, 돈 한 푼 안 들고 영화 한 편 본 기분이다.
내 삶이 마치 전쟁터 같아서 삭막하고 숨 막힐 때, 아직은 세상이 살만하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박연구의 <바보네 가게>도 권하고 싶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수필이 있다.
목성균의 <세한도>다.
엄동설한 저문 강변에 세의(歲儀)를 지고 꿋꿋하게 서 있는 한 남자에게서 흔들리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이 시대의 가엾은 아버지상을 본다.
도시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함몰되어 사는 이들에겐 손광성의 <아름다운 소리들>을 추천하고 싶다.
읽다보면 ‘어디선가 산과(山果)떨어지는 소리, 싸락눈이 가랑잎에 내리는 간지러운 소리, 첫눈을 밟고 오는 여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모두 침묵해야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혹, 슬픔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은가. 정성화의 <돼지고기 반근>을 읽어보라. 한동안 잔잔한 울림이 남아 세상이 온통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짧은 생애를 신들린 듯 글과 함께 살다간 전혜린 작가는 자신의 삶에 완벽한 순간은 바로 이때라 했다.
< 목마른 계절>의 한 대목이다.
‘모든 불행은 사람이 혼자 있을 수 없는데서 온다.
…(중략)…또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나에게서 ‘수필읽기’는 현실도피도, 일상의 차꼬를 벗는 이상도 아니다.
지도 없이 걷는 인생길의 동반자요, 망각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다.
때로는 피난처요 안전지대요 놀이터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필로부터 나 자신을 감싼 시간들이 아스라하지만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수필을 읽고 쓰면서 새벽 여명을 맞이하는 ‘야생적 즐거움’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둠이 엷게 내리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미세한 우울이다.
싫지는 않지만 유쾌하지도 않다.
이 순간 나는 수필을 읽는다.
읽는 동안은 연민이나 외로움에 빠질 틈이 없다.
그건 사람을 마주한 자리에서 예의가 아니다.
‘수필읽기’는 곧 ‘사람읽기’이기 때문이다.
한편의 수필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다.
이것은 수필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수필은 자기 고백의 성격이 강하다.
작가가 뒤에 숨어 화자를 대리인으로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독자에게 직접 자기 이야기를 한다.
즉, 수필의 화자인 ‘나’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다.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와 일대일로 직접 대면한다는 뜻이다.
이런 민 낯의 매력 때문에 나는 수필을 읽는다.
문학평론가 김종완의 말이다.
‘독자가 작가의 권위를 침범할 수 없는 영역에 수필이 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직접 경험한 내 이야기가 문학성을 띄고 찬란하게 변신한 것이 수필이다.
직접 경험한 영역에 어찌 가상의 그림자가 얼씬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수필은 선명하고 명쾌하다.
넋 놓고 읽다간 깜짝 놀란다.
글 속에 작가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허구가 아닌 사실을 다루기에 그렇다.
한때, 세상의 모든 가장자리가 좋았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세계를 내 안으로 함몰시켰다.
현실과 절연하면 할수록 나 홀로 누리는 골방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허나, 언제부턴가 서서히 밀실의 한계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 안위의 진공 속에서 고독의 향락을 누리는 동안, 나보다 더 아픈 이들의 간곡한 곡비(曲庇)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쯤 기가 막힌 또 다른 도피성을 찾았다.
숨어서도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리, 자아를 세계화할 수 있는 곳, 골방에 갇혀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곳, 바로 수필이었다.
내가 만났던 수필 몇 편을 소개한다.
교과서를 통해 수필과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난생 처음 ‘읽는 감동’ 이 무엇인지 알았다.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최초로 하게 했던 수필이다.
구두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걷는 작가와 불안감을 느끼며 앞서가는 여자 사이에 긴박한 심리묘사를 재치 있게 그려 낸 계용묵의 <구두>, 돈 한 푼 안 들고 영화 한 편 본 기분이다.
내 삶이 마치 전쟁터 같아서 삭막하고 숨 막힐 때, 아직은 세상이 살만하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박연구의 <바보네 가게>도 권하고 싶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수필이 있다.
목성균의 <세한도>다.
엄동설한 저문 강변에 세의(歲儀)를 지고 꿋꿋하게 서 있는 한 남자에게서 흔들리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이 시대의 가엾은 아버지상을 본다.
도시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함몰되어 사는 이들에겐 손광성의 <아름다운 소리들>을 추천하고 싶다.
읽다보면 ‘어디선가 산과(山果)떨어지는 소리, 싸락눈이 가랑잎에 내리는 간지러운 소리, 첫눈을 밟고 오는 여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모두 침묵해야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혹, 슬픔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은가. 정성화의 <돼지고기 반근>을 읽어보라. 한동안 잔잔한 울림이 남아 세상이 온통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짧은 생애를 신들린 듯 글과 함께 살다간 전혜린 작가는 자신의 삶에 완벽한 순간은 바로 이때라 했다.
< 목마른 계절>의 한 대목이다.
‘모든 불행은 사람이 혼자 있을 수 없는데서 온다.
…(중략)…또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나에게서 ‘수필읽기’는 현실도피도, 일상의 차꼬를 벗는 이상도 아니다.
지도 없이 걷는 인생길의 동반자요, 망각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다.
때로는 피난처요 안전지대요 놀이터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필로부터 나 자신을 감싼 시간들이 아스라하지만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수필을 읽고 쓰면서 새벽 여명을 맞이하는 ‘야생적 즐거움’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출처 :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문학
글쓴이 : 이복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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