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그림에 뜻을 둔 나는 생업을 위해 표구사를 했었다.
액자를 만들고 틈나는 시간 그림을 그렸다.
공항동에 있던 가게였는데 진열장에는 주로 내가 그린 그림을 걸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가게에 들러 진열된 그림을 팔라는 것이었다.
그림은 긴 줄을 매단 채 강가에 머물던 빈 거룻배를 그린 것이었다.
모든 것이 부끄럽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터라 당연히 거절했다.
여인은 다음날 다시 와서 같은 말을 했다. 이 분은 꼭 이 그림이 필요한가.
이런 생각이 든 나는 그림을 포장했다.
"드릴 테니 그냥 가져가세요."
하는 내 말에 그러면 안 된다며 몇 차례 돈을 주려했다. 거듭되는 거절에 안되겠다 싶었는지
"예술가는 작품을 그냥 주면 안 되는데."
이 말을 남기고는 포장된 그림을 들고 자리를 떴다.
여인이 그 다음날 가게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돈을 안 받으니 대신 책을 준다며 직접 쓴 소설이라고 했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라는 책이었다. 작가 이름은 윤정모였다.
막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었다. 1982년 일이다.
윤정모 작가와의 첫 인연이다.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 교과서에서 보지 못한 이야기에 충격이 너무 컸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란 말인가.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소설이었다.
그 뒤 작가를 잊고 살았다. 가끔 활자를 통해 그녀의 삶을 스쳐 듣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30여 년이 흘렀다. 인연이 인연을 부른다 했던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봉선화를 통해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소설가 윤정모 작가가 어제 교보문고에서 작가 강연 및 사인회를 열었다
이번에 나온 새 책은 문학과 행동에 연재를 했던 작품을 엮은 '자기 앞의 생"이다.
숨어있는 우리 현대사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소설 ‘자기 앞의 생’
촛불의 의미를 새기며 다시 정독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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