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수필

통일의 밥상

칡뫼 2015. 11. 6. 06:10

 

 

 

 

                                                     분단시대     장지에 먹     1984년         칡뫼 김구

 

 

 

 

                                  통일의 밥상                                                              

                                                                                                               김형구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 굳게 다문 입. 차려 자세를 한 팔과 어깨에 힘이 실려 있었다. 60여 년 전, 전쟁터로 향하던 때의 모습이 저러셨을까. 팔순 노병의 주름진 얼굴에는 비장함이 흘렀다. 깊게 눌러 쓴 재향군인회 모자. 빛바랜 양복저고리에는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 화랑무공훈장이 달려있었다.

           “다녀오마.”

금일 노병들의 집결지는 광화문. 전선은 며칠째 시청광장과 광화문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다. 시민단체에 맞서 보수단체가 지원군을 자처한 것이다

       내 고향은 경기도 김포의 휴전선 가까운 마을 갈산리다. 동네 산에 오르면 한강과 임진강이 보이고 북한 땅이 코앞이다. 접경지역이라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삐라를 줍거나 대남, 대북 선전방송을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삐라는 양쪽 것이 다 떨어졌는데 종이나 그림색깔이 코흘리개 눈에도 우리 것이 훨씬 좋았다. 대남방송 스피커 소리는 바람결 따라 크게 들렸다 작아지곤 했는데 주로 하는 말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박정희 괴뢰도당’이란 말이었다. 이에 맞선 대북방송은 ‘귀순’, ‘자유대한’이란 말에 유행가를 자주 틀어주었다.

      수없이 듣던 아버님의 참전이야기 때문일까. 눈뜨면 보이는 군인들과 반공교육 때문일까, 어릴 적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삼팔선과 휴전선란 굵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같은 것으로 여겼던 두 선이 학년이 높아져서야 하나는 직선이고 하나는 곡선임을 알았다. 하지만 삼팔선이건 전쟁 후 그어진 휴전선이건 작두날에 잘린 짚단처럼 동강난 한반도의 상처란 점은 같았다. 또한 빨갱이란 말 때문인지 북쪽은 붉은색, 남쪽에는 파랑색이 자연스레 칠해졌다. 그 느낌이 강해서일까. 태극기의 태극문양과 색깔조차 우리 민족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전쟁은 낙인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에 분단의 철조망을 새겨놓았다. 그로인해 의지와 상관없이 편이 갈려 살았다. 지면 죽는 것 이기면 사는 것일까. 생각이 틀리면 네 편, 내 편이 되어 결사적으로 싸운다.

       저녁나절,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어떻게 지킨 나란데, 나라를 흔들어, 데모나 해대고.”

      “나라를 흔들기는요, 그 사람들 오죽하면 길에 나섰겠어요?”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반론을 제기했다.

       “전보다 얼마나 잘 사냐. 호강에 겨워 그러지.”

       “잘 살면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빨리 밀어붙여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용산참사 후 들끓는 아우성에 동조하던 나였다.

       “법을 지켜야지, 법!”

        “법은 배운 사람들이 더 안 지켜요. 아버지. 보셨잖아요. 부동산투기. 병역기피, 논문표절. 그 사람들 할 수 있는 건 다 해요. 보통사람들은 법 없어도 산다구요.”

논쟁은 어머님의 눈짓과 밥상에 의해 휴전으로 들어갔다.

        분단의 업보일까. 태어나면서 세상에 눈뜨고 뭔가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 우린 편 가르길 좋아한다. 생각의 다름, 돈의 많고 적음, 직책의 높고 낮음, 배움의 차이와 배운 곳의 다름까지, 더군다나 태어난 장소까지도 들먹이며 나누고 가른다.

        우리 가족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촛불집회 때 아버님은 소속단체의 부름을 받고 세종로로 가시고 내 마음은 서울광장으로 향했었다. 그 사이에는 전경버스가 빈틈없는 굵은 선이 되어 분단의 벽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는 끼니때가 되면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함께하는 가족이다.

        “아버지 이 된장찌개 좀 잡숴보세요.”

        “오냐. 이 밥 좀 더 먹어라.”

요즘 들어 식사량이 부쩍 줄어든 아버님은 늘 당신 밥그릇의 밥을 내게 덜어 주신다. 한 숟갈은 정 떨어진다며 꼭 두 숟갈을.

       눈에 보이는 분단의 휴전선뿐만 아니라 마음과 마음사이에 난 단절의 경계선도 무너뜨릴 어머니의 밥상 같은 그런 통일의 밥상은 없을까?

 

 

                                       <2015년 에세이피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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