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스케치

8월과 9월 사이에서

칡뫼 2018. 9. 3.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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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8월은 무척 더웠다

더위를 겨우 겨우 이겨내며 작업을 해냈지만

대작사건으로 다시 들이닥친

정신적 무더위는 정말 추스르기 힘들었다.

한동안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사건은 단순해 보였지만

그를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논리는 나를 지치게 했다.

그들은 나름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했으니

나만큼 알지 못하면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림 하는 사람이 소위 미술사를 그들보다

까마득히 모를까

 

그래 그렇다 치자.

얕은 미술지식으로 겨우겨우 작업의 이유를 만들며

한 뼘 한 뼘

조심스럽게 전진해온 나에게

그들의 논리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동안의 시간과 작업이며 가치관까지 통째로 흔들렸다.

 

반론삼아 그동안 알고 있던 미술 지식을 다시 챙기고

정리하는데 한참을 소모했다.

미술행위와 그 결과 그리고 수용의 가부문제.

대중과 작가의 관계. 현대미술의 논리. 사고.

수없이 가지를 뻗는 생각의 흐름 등.

마음을 열고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려고도 해 봤으나

아닌 것은 아닐 뿐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만든 생각의 탑은 어디까지가 진리일까.

우리가 믿었던 탑은 그동안 수없이 무너져왔다.

탑 허물기가 어쩜 예술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림은 '나'를 그려내는 작업이다.

그가 주장한 '나'를 그리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진정성의 결여 때문이다.

진정한 '나'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기이함이 아닌 새로움 뒤에는 늘 진정성이 있다.

그들의 말대로 알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숨길 이유도 없는것이다.

그의 작업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심과 사술이 들어간 작업방식일 뿐이다.

 

그렇게 8월은 가고

9월이 오는 틈에 나는 지금 있다.

시간에 틈이 존재할까.

시간은 끊을 수 있는 것일까.

9월이 오로지 9월일까.

어쩜 1월이요, 2월이고 그 무덥던 8월까지

한 몸이 아닐까.

 

자르고 재단한다고 시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예술의 가치

진정성 또한 무한한 시간과 한 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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