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칡뫼 멋대로 읽기

글 그리고 댓글과 답글

칡뫼 2020. 11. 9. 07:53

틈나는 대로 미술관을 찾아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틀린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을 본다고 해서 제대로 작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표현한 그림은 온전히 작가가 아니라 알고 보면 작가가 생산한 일종의 기표입니다. 예를 들어 교장선생님이 훈화를 한다고 훈화 자체가 교장 선생님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죠. 다만 학생들 나름대로 훈화가 지시하는 방향성은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림도 일종의 언어요 작가의 말이기 때문이죠.

결국 그림에 작가의 본질이 있는 듯 해답을 찾으려 한다면 그림 읽기는 번번이 실패한다 할 것입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나를 보는 것. 만나는 작품은 나를 읽는 거울, 그 이상 이하도 아닐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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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림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나를 읽는 것. 만나는 작품은 나를 읽는 거울, 그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말을 현대 예술가 또는 비평가들로부터 흔히 듣는 말인데, 저는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예술작품은 하나의 기호이고, 기호를 생산하는 활동은 의사소통이 일차적 목적입니다. 작가의 의도(메시지)가 감상자에게 제대로 전달될 때 그 작품은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이 그렇고, 시가 그렇고, 그림, 조각, 영화. 모든 기호 생산 활동 또는 예술의 본래 목적은 의사소통에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의 본질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을 읽을 수 있다면 작가와 감상자 사이에 소통이 단절돼도 상관없다는 말로 들리고,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감상자는 제멋대로 작품을 보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품의 품질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예술의 문법이나 기술의 정련도를 갖고 평가하나요? 아니면 작가의 유명세나 갤러리 입장료가 결정하나요? 작품에 대한 평가는 오롯이 감상자의 몫이라는 말은 멋있고 그럴듯하게는 들리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감상자가 그 정도 해석능력이 있다면 굳이 미술관에 갈 필요 없이 자연물이나 어쩌다 생긴 인공물들로부터도 자신의 내면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 해석 능력을 지닌 사람은 이미 작가 수준에 도달한 사람일 겁니다. 정말로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감상자가 자기가 처한 상황,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서 제멋대로 해석해도 상관없는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만나는 작품은 나를 읽는 것"이라는 말은 감상자에게 너무 큰 짐을 안기는 말이고, 이미 그 경지에 오른 작가들이 자신의 능력을 감상자들에게 강요하는 무리한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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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을 다시 더해 봅니다. 말씀하신 작품과 그것을 바라본 관계는 늘 오랜 세월 사유를 불러온 주제입니다.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 완벽한 자신의 구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그리고 싶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시작하지만 수많은 과정에 작가도 모르는 무의식적으로 써지는 색과 선이 있다 할 것입니다. 즉 그 결과물 또한 어떤 면에서 작가의 방향성(작가의도)만 작동한 결과물이지 작가 자신 본질을 구현한 것은 아니란 것이죠.

설사 작가의 모든 것이라 해도 해석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죠. 즉 나무를 보고 수 없는 그림과 시가 쓰여 진다 한들 나무의 본질을 나름 해석한 결과물이란 것이죠. 본질은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작품이지만 어느 순간 낯설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다시 그린다 해도 결코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고요.

결국 작품은 심하게 말하면 작가가 생산했지만 작가와는 또 다른 기표일 뿐입니다. 결국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이 관객과 만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는 감상자의 전이해가 작동하는 시공간인 것이죠. 즉 감상자의 안목에 작품의 감동 또는 무시 등이 정해진다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명동에서 행인들 중에 순간 눈에 띄는 여인을 만나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감상자의 모든 것을 순간 사로잡았다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미지가 모두일 수도 있습니다. 사귀어보면 (깊이 보면) 더 빠져들 수도 있고 아니면 보기만 좋았던 것 일 수도 있는 것이죠. 여자가 잘못된 게 아니라 감상자 내가 그와 연결점이 없을 뿐입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명성있는 그림도 전혀 공감이 안 되는 작품이 많죠. 그래서 그 작가를 공부하고 작가의 일대기를 보고 잠시 이해를 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고요. 아니면 오랜 후에 깊이 빠져드는 경우도 있고요. 결국 세상의 모든 이해는 본인의 몫이며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공간의 몫이겠지요.

이번 박은태 작가의 작품도 나중에 작가노트를 보니 작가는 작업 철골구조물에서 몬드리안의 추상화가 떠올랐고 왜 몬드리안 작품에는 인물을 안 넣었을까. 내가 그려 넣어 보자가 작품동기였더군요. 저와는 완전 다른 시점입니다. 물론 노동자에 대한 인간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배어있는 방향성은 저와 일치했고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감상자의 부담 보다는 세상 알아나가듯 예술품 감상세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작가의 생각을 나름대로 더듬어 그동안 해석된 감상이 아닌 자기만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해서 적은 글입니다. 결국 독특한 자기만의 시선은 또 다른 미술사 또 다른 해석을 세상에 던지겠지요. 어쩜 진짜 무서운 협박성 말은 '아는 만큼 보인다.'이겠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