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담긴 그림 한 점
김 형 구
오랜만에 처가를 찾았다. 인사드리고 건넛방에 들어가니 벽에 낯익은 작은 그림이 보였다. 소꿉친구처럼 반가웠다. 이십대에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한 뼘 높이에 폭은 두 뼘 정도로 멀리 섬이 늘어서 있고 그 앞으로 고깃배와 점점이 박힌 김발장대, 가까이 언덕에는 배를 향해 손 흔드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팔 십년대 초, 인생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나는 그림에 뜻을 두고 스케치여행을 자주 다녔다. 이른 봄이었지 싶다. 여행은 안면도 영목포구까지 버스를 이용하고 그곳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배를 타고 대천으로 가서 기차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나는 어둠이 깔릴 즈음 겨우 안면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종점은 영목포구 한참 못 미쳐 있었다. 그림도 그리고 오전에 배를 타려면 포구에서 잠을 자야했다. 내린 승객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낯선 밤길을 홀로 걸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영목항에는 허름한 불빛 아래 여관이 둘 있었다.
"이집 저집 망설이다가 서울서 왔기에 이리 들어왔어요."
내가 묵은 곳은 '서울여관'이었다.
다음날 아침, 방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다. 딸인 듯했다. 고교생 소녀였을까. 총각은 낯선 처녀가 들고 온 밥상을 처음 받아 보았다. 야릇하고 민망했다. 문학작품 속 ‘사랑손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편 삼삼해서 좋기도 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에는 젓갈이며 굴, 미역, 생선구이 등 해산물이 풍성했다. 특히 파래김의 알싸한 첫맛과 달달한 뒷맛은 지금까지 혀끝에 남아있다. 아마 예쁘장한 섬 처녀가 들고 들어온 상차림이라 그렇지 싶다.
선창가로 향하니 다방이 하나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틈새로 바닷물이 보였다.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 마담은 풍선껌을 씹고 있었다. 낡은 전축에서는 <섬마을 선생님>이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어쩜 그 노래가 제격이라는 지금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창가에 앉아 달콤한 커피와 함께 바다를 마셨다. 창밖에는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내 마음처럼.
달떠서 길을 걸었다. 널어놓은 파래김, 쌓여있는 굴껍데기, 비릿한 바닷냄새, 갈매기 울음소리. 언덕위에는 그림엽서에서 방금 나온듯한 흰 벽에 빨간 지붕을 한 교회당이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세상이 닦아놓은 흰 고무신 같았다. 멀리 섬이 보이고 그 앞으로 갯벌이 누워 있고 포구는 그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었다. 시련을 이겨낸 흔적일까. 갯벌 위에는 삶의 느낌표처럼 점점이 김발장대가 박혀있었다. 그 사이로 달리는 고깃배는 연 꼬리처럼 물결을 달고.
서울 총각은 먹을 갈아 포구풍경을 화선지 위에 옮겼다.
그 뒤 십 수 년이 흘러 가정을 꾸린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영목항을 찾았다. 서울여관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 지은 2, 3층 됨직한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1층에는 꽃게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있었는데 일부러 그곳을 찾았다. 식사를 마친 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여쭈어 보았다.
"십 수 년 전에 이곳에 왔었는데요, 혹시 여기가 서울여관자리 아닙니까?"
"네, 맞아요. 서울여관, 제가 쭈욱 이집에서 살았죠."
"아! 그래요 그때 보니 예쁘장한 따님이 계셨던 것 같은데."
"우리 딸애요, 저기 있잖아요."
장난감을 가지고 천방지축 노는 아이 옆에 갓난아기에게 젖 먹이는 젊은 아낙이 있었다. 일요일이라 친정집에 다니러 왔다는 바로 그 소녀였다. 섬 집 소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가족과 섬을 다녀온 것이 또 십여 년 전 일이다. 그러니 총각시절 안면도로 스케치여행을 갔던 때가 벌써 삽 십여 년 전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림 속 풍경 때문인지 과거 일이 오늘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련한 추억이 작은 그림 속에 커다랗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동인지 <따뜻한 사람들.> 수록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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