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기다림 김형구 아침에 보니 정화수가 솟구쳐 ‘하늘 고드름’이 되어있었다. 그날 밤에도 할머니는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비셨다. 두 손을 모아 빌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주문처럼 무슨 말인지 하셨다. 가끔 '천지신명'이란 말이 들리기도 하고 얼핏 '비나이다' 소리도 들렸다. 궁금해 쪽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여 보았지만 소리는 더 들리지 않고 절하는 모습만 보였다. 사락사락 내리던 싸락눈이 포실한 함박눈으로 변할 때 쯤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오셨다. 내복차림으로 반가워 폴짝 뛰는 나를 힘껏 안아주셨다. 머리 위에 내렸던 눈이 녹아 비녀를 적시고 있었다. "아이쿠 내 새끼" 할머니의 토닥거림에 그때서야 나는 다람쥐처럼 이불속으로 쏙 들어갔다. 눈이 소복이 내리고 겨울밤은 깊어갔다. 동네 개가 심하게 짖었다. 안마당에 있던 우리 개 '도끄'도 덩달아 짖어댔다. 갑자기 밖이 시끄러웠다. 누군가 낯선 이라도 나타났을까. "뽀드득 뽀드득" 길 지나던 발자국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멈췄다. ‘도끄'가 더 크게 짖어댔다. 나는 무서워 이불 속에서 바짝 웅크린 채 귀를 세웠다. 낮에 보았던 '한 손이 쇠갈고리로 된 사람일지도 몰라' 생각을 하니 더 무서웠다. "그 뉘슈?" 사랑채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릴 때 쯤 벌써 할머니는 남폿불을 밝히고 마루에 나가 계셨다. "눈이 많이 와서요, 산 너머 '남장골' 가는 객인데 잠자리 좀 청하려구요." 굵은 남자 목소리가 대문간을 울렸다. 할아버지께서 대문을 열자 돌쩌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길손이 어깨며 발에 묻은 눈을 소리 내어 털고 사랑채에 들고 나서야 할머니는 방에 들어오셨다. 그리곤 무슨 일인지 긴 한숨을 지셨다. 할머니는 밭일 중에도 동네어귀 '회나무재'에 낯선 이라도 보이면 호미를 든 채 한참을 바라보곤 하셨다. 6.25 전쟁 통에 행방불명된 큰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늦은 밤 대문 앞에 이른 이를 행여 아들이라 생각하신 것일까. 낮이건 밤이건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아들이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지 싶다. 누워서도 한동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시던 할머니를 보았던 유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할머니는 소란에 선잠이 든 나를 꼭 끌어안고 주무셨던가. 그 뒤로도 나는 끝내 큰아버지를 뵐 수 없었다. 몇 해가 더 지났을까. 복사꽃이 흐드러진 어느 봄날 할아버지는 면사무소에 가셔서 큰아들 사망신고를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끼니마다 할머니께서 묻어 두었던 밥주발은 계속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2013년 에세이문학작가회 동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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