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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잠곡 김육의 청풍김씨 족보 서문과 한양 조씨 족보 서문

칡뫼 2012. 3. 1. 09:29

                         

                             청풍김씨 족보 서문(잠곡유곡 9권)

 

                                                                     잠곡 김육(金堉, 1580~1658) 

 

 

 

사람치고 그 누가 일족(一族)이 없겠으며, 일족에게는 반드시 족보(族譜)가 있는 법이다.

일족이면서 족보가 없다면 사람들이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화목하게 도타이 지내는 마음이 생겨날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 족보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우리 김씨는 신라(新羅)에서 나왔는데, 신라 시대에는 신라의 지역에 산재해 있었으니, 경주(慶州), 안동(安東), 상주(尙州), 강릉(江陵)의 김씨는 모두 같은 성씨이다. 그러나 윗세대에는 족보가 없어서 분파(分派)를 상세히 알 수가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우리 집안은 불행하게도 여러 차례 화란을 겪었으며, 또 병란(兵亂)을 만나 보첩(譜牒)을 잃어버렸다.

이에 비록 아주 가까운 친족이라도 서로 이름자를 알지 못하기에, 내가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같은 성씨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그의 지파(支派)를 물어 보고 그의 가보(家譜)를 보여 주기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년 만에 겨우 완질(完帙)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마침 중국으로 조회가는 사신의 행차가 있기에, 드디어 초고(草稿)를 싸들고 가 관소(館所)에 몇 달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한 질을 깨끗하게 베끼었다. 비록 상세히 다 갖추어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역시 이 뒤로의 종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동성(同姓)이야 참으로 족보에 올려야 하겠지만, 이성(異姓)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상세히 기록한단 말인가?”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말이냐. 사람이 처음 태어날 적에는 단지 한 사람의 몸이었는데 점차 나뉘어져서 천만 인이 되었다. 처음부터 본다면 모두가 같은 배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아들의 아들은 동성(同姓)의 손자가 되고, 딸의 아들은 이성(異姓)의 손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딸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아들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비록 내외(內外)의 나뉘어짐이 있기는 하지만, 천속(天屬)의 은혜는 참으로 그 사이에 조금도 같고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선조(先祖)로부터 보면 지금의 이성 친족은 모두 선조가 같이 사랑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의 자손만 유독 사랑하고 선조가 같이 사랑하던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친한 데로부터 소원한 데에 미치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치는 법이다. 비록 복(服)이 다하고 정(情)이 다하였다고는 하지만, 나의 선조의 자손이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 어찌 길 가는 사람을 보듯 하여 그의 출신에 대해서 까마득히 몰라서야 되겠는가”하였다.

 

소명윤(蘇明允 명윤은 소순(蘇洵)의 자임)이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샘솟듯이 솟아날 것이다.” 하였는데, 아, 좋은 말이로다.

나 역시 이에 대해 느껴지는 바가 있으니, 우리 족보에 이름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 족보를 보고서 돈목(敦睦)한 마음이 생겨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10년 정축(1637, 인조 15) 인일(人日)에 후손(後孫) 절충 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 지제교(行龍驤衛副護軍知製敎) 동지성절천추사(冬至聖節千秋使) 김육(金堉)은 황성(皇城)의 옥하관(玉河館)에서 삼가 쓴다.

 

번역: 한국고전번역연구원

 

 

                                                           청풍김씨족보

 

 

                          한양 조씨 족보 서문(잠곡유곡9권)                                

 

                                                             잠곡 김육(金堉, 1580~1658)

 

 

영해 군수(寧海郡守) 조빈(趙贇)이 그 고을에서 한양 조씨의 세보(世譜)를 간행하고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자네 역시 조씨의 외손(外孫)이니 서문(序文)을 써서 한마디 하는 것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서문을 쓰겠는가. 앞에는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의 시호임)의 서문이 있고 뒤에는 태학사(太學士) 일장(日章 조경(趙絅)의 자임)의 글이 있는데, 어찌 담비 꼬리를 잇는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조군이 또 심부름꾼을 보내어 아주 간절하게 청하므로, 내가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어 내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우리 청풍 김씨가 예전에 족보가 없었기에 내가 개연히 상심하여 “사람이 되어 자신의 출신을 몰라서는 안 되며, 또 그 분파(分派)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와 나뉘어져서 길 가는 사람처럼 되는 것은 이치와 형세가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까마득하게 서로 모른다면 금수(禽獸)나 초목(草木)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이에 드디어 동종(同宗)들에게 두루 묻고 씨족지(氏族志)를 널리 구하여 10여 년간 공을 들여서 비로소 족보를 완성하였다. 그러므로 조군이 나에게 서문을 써 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는 것은 필시 조상을 떠받들고 종친을 존경하는 마음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이 품부(稟賦)받은 것은 아버지가 낳아 주고 어머니가 길러 준 것으로, 그 은혜가 같으며,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도 똑같다. 그러니 부당(父黨)과 모당(母黨)에 대해 친애하는 마음 역시 어찌 내외(內外)의 다름이 있겠는가.

조씨의 족보는 바로 문절공(文節公)께서 찬한 것으로, 지금 이미 100여 년이나 되었다.

그 뒤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나뉘어진 지파(支派)를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내가 항상 이를 한스럽게 여겨서 찬술(撰述)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겨를이 없었다.

지금 조군이 일장(日章) 및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여기저기서 널리 알아 낸 다음 이를 기록해서 족보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를 문절공이 찬한 것에 이어 붙여 간행해서 널리 유포시켰으니, 그 뜻이 가상하고 정성 역시 지극하다.

조군이 이미 내가 뜻이 같음을 기뻐하고 나에게 한마디 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니 어찌 감히 그 뜻을 모른 체하면서 두터운 바람을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있다. 사람에게 족보가 있는 것은 선조들께서 한 바를 보고 그 자취를 이으려는 것으로, 덕행(德行)을 보고는 학문의 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문장(文章)을 보고는 국가의 성대함을 빛낼 것을 생각하고, 공업(功業)을 보고는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청백(淸白)함을 보고는 자손들에게 편안함을 남겨 줄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시조(始祖) 이하의 적덕(積德)과 여경(餘慶)이 후손들에게 흘러 전하고, 공업(功業)과 문장(文章)이 국승(國乘)에 실려 있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아주 슬프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 외증백조(外曾伯祖) 정암 선생(靜庵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시호임)께서는 학문과 문장이 중묘조(中廟朝)에 이름났는데, 나의 고조이신 대성공(大成公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식(金湜)을 가리킴)과 더불어 뜻이 같고 도가 같아서 이택(麗澤)의 의리가 있었다.

두 분 모두 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일세의 추앙을 받았는데, 불행하게도 간흉(奸凶)의 무고(誣告)를 받아 헤아릴 수조차 없는 화(禍)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 차마 그 일에 대해 말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음산한 기운이 이미 사라지고 해와 달이 밝게 비치매 성주(聖主)께서 나오고 군자들이다 등용되어, 이미 죽은 간사한 자들을 다시 주벌하고, 드러나지 않은 덕의 숨은 빛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높은 관작을 추증하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성균관에서 배향(配享)하고 서원에서 향사(享祀)하였다.

이에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이미 바르게 되고 문학의 풍조를 다시 떨치게 되었다. 그러니 하늘의 도는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린다는 것이 분명하여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아아, 공자와 맹자가 방황을 하고 정자와 주자가 곤욕을 당한 일은 역시 이치 가운데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는 천년토록 전해지고 그 이름은 만대토록 드리워졌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어찌 이를 이유로 조금이라고 기가 꺾여서야 되겠는가. 이 족보를 보는 자손들은 게을리하지 말고 더욱 힘 써야 할 것이다.

 

 

 

[주D-001]담비 꼬리를 잇는 일 : 못난 글을 훌륭한 글 뒤에 덧붙인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조왕 윤(趙王倫)의 당여(黨與)가 모두 경상(卿相)에 제수되어 그의 노복들까지도 모두 작위를 받게 되었다. 이에 관(冠)에 장식하는 초미(貂尾)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장식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구미속초(狗尾續貂)라고 비난하였다. 《晉書 卷59 趙王倫傳》

[주D-002]이택(麗澤)의 의리 : 친구간에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학문을 강습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못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는 이것으로써 붕우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희(朱熹)의 《본의(本義)》에는, “두 못이 서로 붙어 있어 서로간에 불어나게 하는바, 붕우간에 강습하는 것은 그 상(象)이 이와 같다.” 하였다.

 

[주D-003]헤아릴 …… 화(禍) :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가리킨다. 이때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 수구파(守舊派)가 이상 정치(理想政治)를 주장하던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 신진 세력을 무고하여 사사(賜死)하거나 유배 보냈는데, 김식은 거창(居昌)으로 피해 있다가 자살하였다.

 

 번역: 한국고전번역연구원

 

 

2010년 12월 26일

 

제갈량과 사마의

 

   

                       

                                                                                        남한강 여주 産

                                                           

출처 : 꿈꾸는 사람들
글쓴이 : 제갈량과 사마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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