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보르헤스는 말한다

칡뫼 2012. 10. 19. 11:38

 

 

 보르헤스는 말한다.

“나를 부르는 이름이 어떤들 무슨 상관인가. (…) 이지러지고, 공허한 잿더미 속에서 꺼져가는 이 사랑스런 세계를 본다. 세계는 꿈과 망각을 닮았다.” (『보르헤스 문학전기』, p. 398)

 

세계는 시간의 그림자로서 꿈과 망각을 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회적인 생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역설적이게도, 시간이라는 절대 자체는 이렇게 사랑스런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무분별에게는 세상이 그저 공할 뿐이다. 야생화 들판처럼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이 세상을 또렷이 보려면, 한 인간의 눈이라는 매체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모든 빛을 합쳐놓으면 그냥 하얗게 보이듯이, 모든 곳에서 동시에 보는 절대의 무분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고 컬러풀하게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무분별을 보았지만, 다시 분별의 세계로 돌아온 작가! 절대를 이해하는 상대로서의 작가! 총상(總相)을 알면서도 별상(別相)으로 살아가는 작가! 절대가 세상에 출현하는 매체로서의 작가! 비록 그는 시간 속에서 스러져가겠지만, 그가 창조해내는 ‘무분별 후득지’로서의 문학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그냥 나이브하게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세상이 시간의 그림자로서 스러져갈 수밖에 없는 진실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절감한 후에, 정말 만물과 하나 된 대자유의 몸으로 일상으로 돌아와서 이 오묘한 ‘법계(法界)’가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불생불멸을 얼핏 보았음에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돌아 나왔다. 만년의 보르헤스는 자신의 생멸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형상이 있는 것들의 세계인 일상은 생멸할 수밖에 없어 무상하고, 불생불멸을 알면서도 일상의 세계를 살다 소진해가는 자의식으로서의 ‘보르헤스’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불행히도 실재하고, 나는 불행히도 보르헤스다.”

 

 생멸과 불생불멸 사이의 경계인(人) 보르헤스! 그는 확실히 통속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인도 아니다. 그는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세상으로 돌아 나오는 사람이다. 문학은 통속적 다언(多言)에 매몰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절대의 무언(無言)도 내친다. 상대와 절대 사이의 절묘한 긴장을 체득한 작가는 결국 ‘말할’ 수밖에 없다.

 

 절대를 알면서도 어디까지나 상대로 살아가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절대를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거의 절대에 가까운 무언가를 ―이미지와 리듬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그려내는 작가는 그래서 위대하다. 글은 얼마나 오래 가는가! 각 시대는 나름대로 그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작가를 배출해왔다. 시대마다 기라성 같은 작가들을 배출해낸 인류는 위대하다. 20세기의 위대함은 먼 훗날 우리시대가 배출해낸 작가에 의해 기억될 것이다. 그 중에 보르헤스가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런 일이다.

 

                                                              -김홍근의 '보르헤스: 문학과 시간' 중에서-

 

 

김홍근(金洪根)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

동 대학원 문학석사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 문학박사

 

성천문화재단 부원장

서울대 대학원 강사

한국간화선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평론가

외국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