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스크랩] 한국수필 이렇게 달라져야/김우종

칡뫼 2012. 10. 30. 13:09

한국수필 이렇게 달라져야

 

                    /김우종(문학평론가)



문학 장르에도 사회적 인기도와 서열이 있다.
지금 한국문단에서 수필가는 약 5천 명쯤. 시인은 이보다 두 배쯤 되고, 소설가는 훨씬 적고, 평론가는 아주 적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 정도로 수필가가 많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수필도 인기 짱일 때가 있었다. 1960년대 말쯤 MBC라디오에서는 한 사람의 에세이를 꼭 1년간 매일(일요일만 쉬고) 낭독한 일이 있다. 다음에는 이것이 수필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는 이런 예가 없고, 소설은 꼭 한 번 홍명희의 ‘임꺽정’이 이렇게 낭독되다가 월북해서 중단된 일이 있다. 수필이 이렇게 매스컴을 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것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매우 황당한 일을 겪는 일이 더 많다.

1.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에는 지금도 수필이 없다.
2. 노벨문학상에는 수필이 없다.
3. 한국문학작가회(전 민족문학작가회)에는 수필가가 없다.
4. 문예진흥원에서는 수필집에 대한 창작 지원을 거부한 일이 있다.

이런 사태는 일부 계층의 수필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세계 어디서나 아직은 수필을 예술의 전문적 영역으로 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둘째, 세계 어디서나 아직은 수필을 예술 장르로서 제대로 이론화한 학자나 평론가가 없다. 특히 ‘모든 예술은 상상의 힘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기본적 조건에 대한 기법과 이론이 정립되지 않고 있다.
셋째, 수필은 수필가들 자신이 예술로서의 전문성을 부정하고, 다만 교양생활의 일부로서 쓰고 발표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예술은 전문적 기술 영역이며 그것은 고유한 기법이 있어야 하고 이론적으로 연구되고 개발되고 발전된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우수한 수필을 쓸 수는 있지만 예술다운 전문적 기법에 무심한 글은 자칫 문학외적 잡문이 된다. 그것은 독자들로부터 설익고 떫은 감처럼 외면당할 수 있다. 이런 수필이 남발되면 맛좋은 홍시 같은 명작이 있어도 그 맛을 보기 전에 떫은 감 하나를 먹어보고 실망한 사람들이 수필 전체를 떫은 과일로 분류해 버리는 오류가 발생한다. 신춘문예에서도 수필을 빼고 창작지원금에서도 빼고 문학단체에서도 빼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수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사람들의 실수다.
시도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시가 있고 어두운 밤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날뛰며 진실을 배반하는 문학이 있듯이 모든 문학은 우등생과 열등생이 따로 있다.

한국 수필 이것이 달라져야

1. 사상성의 빈곤

한국수필은 내용이나 형식에서 좀 더 강조해야 할 다음 조건들이 있다.
내용 조건으로는 먼저 사상성이 있다. 문학은 서정성과 사상성이 다 중요하지만 한국수필은 일반적으로 서정수필이며 사상성은 낙제점에 가깝다.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정열도 심오한 지성도 내포하지 않은’ 문학이라고 피천득의 ‘수필’은 예부터 가르쳐 왔다. 심오한 지성이 없다면 사상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 사상은 사회적 이념만이 아니라 철학적 신념도 종교적 신념도 사상이다. 그런데 ‘심오한 지성도 내포하지 않은’ 문학이라면 사상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상은 지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 ‘정열’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어떤 글이 될까?
연인에 대한 사랑도 정열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불의를 보고도 정의감이 끓지 않으면 그것은 양심이 메마른 방관자의 문학이다. 그러므로 이를 부정하는 문학은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문학이 될 수 없고 정부의 창작지원금을 요구할 명분도 없다.
사상성과 서정성 문제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두 사람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피천득의 ‘인연’은 서정수필로서 우수하다. 연애 감정에는 사상도 필요 없으니까 일본 아가씨 아사코와 세 번 만나고 헤어진 연애담은 그것만으로 좋은 수필이 된다. 사상성이 없어도 농도 짙은 서정성과 기법이 문학적 감동을 높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수필은 사상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나라 수필의 원칙론이 되고 일반론이 되면 그 나라 수필의 전반적 수준은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다.
윤오영의 수필은 이와 달리 사상성이 짙다. ‘방망이 깎는 노인’은 돈 권력 명예 등만을 추구하는 삶 이상의 더 소중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철학적 사상성이 짙다. 또 ‘염소’도 해질 무렵에 주인 손에 끌려가는 염소새끼들과 그 주인을 통해서 허무주의적이며 비관적인 인간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심오한 철학적 사상이 짙다. 그런데 한국수필은 일반적으로 이런 사상성이 너무 약하다.

2. 사회성의 빈곤

한국수필은 사회성이 지극히 약하다. ‘심오한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문학’이라는 주장대로만 나가면 그렇게 사회적 무관심은 필연적 결과가 된다. 세상이 뒤집혀도 내 얘기에만 갇히면 문학은 자칫 사회적 양심과 책임의식의 회피가 되기 쉽다.
‘수필은 신변잡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신변적 소재이든 우주적 소재이든 상관없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모두의 사랑과 슬픔과 행복의 대화를 풀어 나가는 것이 수필이다.
80년대 KBS 스튜디오에서 서정주와 나는 당시의 한국문학을 말하는 대담 프로를 시작하다가 이런 사회성 문제로 감정적 돌발 사태를 일으킨 일이 있다.
“요즘은 사람들이 감정이 메말라서 시를 안 읽습니다.”
서정주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이렇게 맞받았다.
“아닙니다. 요즘은 시중에서 시집이 더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시만 안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에는 우리 모두의 아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서정주는 벌떡 일어나서 스튜디오 문을 밀고 나가버렸다. TV녹화가 중단되는 방송 사고였다. 패널은 약간 명이지만 여기에 매달린 전체 인원은 20명이 넘는다. 한참 뒤에 그는 뒤쫓아 나갔던 PD와 함께 되돌아왔다. 그리고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사회 문제만 쓰면 시는 다 망친단 말이오.”
사회문제란 곧 ‘우리 모두’의 문제다. 80년대는 참혹한 광주학살사건이 터지고, 김지하는 사형언도를 받았고, 한수산 박정만 같은 나의 제자 문인들 외 다수 문인들이 고문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서정주는 그 국가반란자를 하늘이 내리신 귀한 분이라고 극찬하며 대통령으로 모시자는 TV연설을 하고 그들에 의하여 시인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던 시기다. 이 시기에 내가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고 한 것은 물론 그런 80년대의 사회적 관심사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에 잘 팔리던 시집들도 그런 ‘우리’의 아픔을 말한 것들이었다. 이런 시대성이 아니라 해도 문학의 본질은 마찬가지다. 허기지고 춥고 외롭고 억울한 타인들에 대한 사랑은 문학의 가장 소중한 주제가 되어야 하며 실제로 그것이 세계문학사다. 최근에 공지영의 ‘도가니’가 영화로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이런 감동적인 사회적 관심 때문이며 수필은 이런 예를 보기 어렵다. 그리고 사실은 소설도 그런 관심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 수필이 이런 사회성이 약한 이유는 역시 교과서에서 잘못 배운 탓도 있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피천득 ‘수필’

물론 이런 수필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수필은 그런 것이라야 된다고 하는 배타적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고고한 자세로 조용한 주택가에만 머물러 있어야 좋은 수필이라는 주장은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속을 시끄러운 광장이나 지저분한 꼬방동네나 원통한 분단의 철조망 근처를 찾아가는 수필도 좋은 수필이며 예술성은 그 정신과 기법 나름이다.

3. 한반도의 한국인의 한국문학

오늘의 한국문학은 한국문학으로서 낙제감이다. 한국문학은 한반도의 한국인의 문학이라야 한다. 그런데 한국문학은 한반도 한국인의 문학으로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빠뜨리고 있다. 한반도는 남북을 다해서 한반도이며 이것이 우리의 영토다. 한국 사람도 남북 다해서 한국 사람이다. 우리는 같은 핏줄이고, 같은 언어권이며, 지금도 다 같이 된장 고추장 김치를 좋아하는, 같은 문화와 전통의 동족이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의 문학에는 북쪽 반은 사라지고 없다. 거의 아무도 그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분단 현실이 얼마나 큰 우리의 운명적 과제인지를 잊고 있다.
북쪽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더라도 사실대로 쓰면 남북작가회의도 깨지기 때문에, 써 봤자 그런 문학은 팔리지 않기 때문에, 잘못 쓰면 극우파 꼴통 작가가 되거나 종북작가로 몰리기 때문에, 그보다는 연애질이나 쓰는 것이 훨씬 잘 팔리기 때문에… 등등 이유도 많다.
그래서 대한민국 문학은 오직 남한 땅에 심어진 남한 사람들만의 문학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문학은 한반도 한국인의 한국문학이 아니라, 남한만의 문인이 남한 땅에서 남한 얘기만 하는 반쪽 문학이다. 부모 형제까지 있는 동족이 백 년이 멀지 않은 세월 동안 거의 모두 그 밀폐된 공간에만 갇혀서 가끔 비명 소리만 새어 나오고 있는데, 우리 문학이 그것을 잊고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남한 문인들의 양심의 문제다.
한국수필은 어서 한반도의 문학이 되고, 세계 보편적 인류의 과제, 즉 사랑과 평화의 휴머니즘 운동을 통하여 영역을 넓혀야 큰 소리를 칠 수 있다.

4. 사실 증언의 기록성

수필은 수필 고유의 특성과 장점이 있다. 그 중에서 수필만 지니는 가장 중요한 특성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객관성이다.
소설은 거짓으로 꾸민 허구니까 사실의 상징이 될 수는 있어도 사실 자체는 아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염상진 염상구 하대치 김범우 소화 정하섭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공안검사가 작가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제인물은 하나도 없다. 작가가 운이 좋기도 했지만 그것이 모두 객관적 사실이라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도 그렇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외세 물러가라’, ‘미군 철수’의 위험한 구호가 되지만 실제가 아닌 상상이기 때문에 법적 구속요건이 되기 어렵다. 물론 군사독재국가는 그 따위 법적 요건 따위는 무시해 버리지만 신동엽은 그 시를 쓰고 곧 죽어버렸기 때문에 잡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다. 정확한 객관적 사실의 기록으로 보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중요한 증언으로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은 수필만이 지니는 특성이기 때문에 사실 표현의 특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수필만의 훌륭한 문학성을 창출할 수 있다.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삼국유사)라는 것은 거짓으로 만든 허구의 세계지만 수필가가 이렇게 썼다면 이것은 국가 최고 통치자가 실제로 이상한 짐승임을 밝힌 글이다. 그러니까 민중이 들고 일어나서 임금을 몰아내든지 임금이 그 수필가를 고문실로 끌고 가서 천장에 매달든지 중대한 사태가 벌어진다.
70년대에 내 에세이집이 판매금지가 되었던 것도 양심적인 교수와 학생들이 감옥에서 겪는 고통을 그대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파브르의 ‘곤충기’를 생각해 보자. 이는 곤충관찰기에 불과하지만 벌레 한 마리라도 그만큼 놀라운 관찰력과 실험정신으로 허구가 아닌 사실을 전한 기록성 때문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너무도 재밌고 유익한 글이다. 수필의 장점이 이런 것이다. 다만 이 곤충기를 수필이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문학적 기법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만 그런 기록성만으로도 훌륭한 글이 된다.

5. 상상적 사고의 예술적 기법


수필이 예술이 되기 위한 최선의 기법은 ‘상상적 사고를 통해서’ 쓰는 것이다. 문학의 정의부터 따져 보자.
‘문학은 사상과 감정을 상상을 통하여 언어로써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이다.’ 세계적으로 어디서나 문학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에 분명히 ‘상상을 통하여’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이 정의는 시와 소설 희곡 등만 문학으로 인정하던 시대의 정의다. 수필은 ‘상상을 통하여’ 쓰는 문학이 아니라 사실만을 쓰는 문학으로 알고 있었고, 지금도 이런 인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문학은 상상을 통하여 창작되지 않으면 예술성이 매우 미흡해진다. 그러므로 수필은 사실의 문학이면서도 상상의 문학으로서의 기법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기법이 소재의 이미지화이며, 비유법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은유법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적 사고는 모든 소재를 다른 어떤 의미의 기호로 읽는 것이다.
꽃을 보고 꽃만을 예쁘게 표현하면 그 문학의 예술적 가치는 충분하지 못하다. 꽃을 보되 거기서 꽃이 아닌 세계를 봐야 수필이다. 김춘수가 시로 쓴 ‘꽃’도 그런 꽃이다. 그는 꽃을 보고 꽃이 아닌 이 세상의 다른 무엇을 말한 것이다.
나는 중학교 작문 시간에 연두색 딱따구리에 대하여 쓴 일이 있다. 딱따구리는 내가 매일 만나는 신변적 소재였다. 나는 그 새가 생존을 위해 수만 년간 수없이 변신하고 진화하면서도 아름다움만큼은 결코 잃지 않았던 사실을 알고 이를 써 나갔다. 그리고 말미에서 내 얘기를 붙였다. 나도 장차 그렇게 아름다움을 결코 잃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했다. 왜냐면 나도 그 무렵에는 상급생들의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리면서 새가 그랬듯이 살기 위해 자꾸 변해야 하지만 아무리 변해도 딱따구리처럼 내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야겠다고 썼기 때문이다.
딱따구리는 나무껍질 속의 벌레들을 잡아먹고 살기 위해서 모든 신체구조가 그에 알맞도록 진화된 새다. 혀가 실처럼 길게 늘어지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도 우아한 연둣빛 원피스를 입은 것 같은 그 새는 여전히 너무도 아름답지 않은가! 이때 딱따구리는 내가 살던 그 시대에 내가 되고 싶었던 내 모습의 이미지였다. 그 새를 통해서 상상적 사고로 나의 이미지를 보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의 나를 딱따구리에 견주는 비유법이 되는 셈이다.
리처드 버크는 ‘갈매기 조나단’에서 어린 갈매기를 특히 자유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속한 사회의 완고한 기존적 가치관과 그 권위주의에 과감히 맞서며 더욱 보람 있는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그 새를 통해서 작자는 자유의 참뜻과 인간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갈매기 조나단은 그런 인간존재의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작자는 갈매기를 그런 의미의 기호로 읽은 것이다. 이처럼 모든 소재들은 어떤 다른 것을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우리 언어사회에서는 namu라는 소리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tree(영어)나 arbr(불어)나 木의 우리말 음성 기호다. 단 이것은 국어사전에 오른 기호이지만 새가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은 그 작가의 상상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새에서 자유의 의미를 읽고 있기 때문에 새는 자유의 기호가 된다.
수필이 예술로서 문학성을 높이려면 모든 소재에서 이 기호를 읽어야 한다. 오래간만에 찾아왔던 친구가 그 자리에 남기고 아주 가 버린 자리에 남아있는 빈 커피 잔은 누가 언제 어떻게 커피를 마시고 사라졌다는 사실만의 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만남 우정 사랑 이별 고독 배신 등 다양한 의미를 말해 줄 수 있는 기호다. 책을 읽듯이 그것을 읽고 쓰는 것이 수필이다. 이런 기호를 읽음으로써 수필은 문학 장르가 되고 예술 장르가 된다. 가장 감동적인 표현 형식이 이런 상상적 기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법 중에서도 가장 예술성이 높은 것은 은유법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많은 질문에 대하여 가스똥 바슐라르가 말한 것만큼 명쾌한 것은 없다. 그는 ‘이미지의 현상학’이라는 작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적 감동이란 상상력의 견지에서 보면 이미지가 상상력을 촉발시킴으로써 상상력이 그의 온 힘으로 그 이미지를 원형의 이미지로 밀고 갈 때, 즉 이미지가 상상력의 전적인 움직임 속에서 원형의 이미지로 동적인 변화를 수행할 때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정신적인 효과’다.
설명이 복잡한 것 같지만 이것은 중학교 국어시간에 배우는 은유법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력으로 보조관념을 통해서 원관념에 도달하는 것이 비유법이고, 그 중에서 원관념이 감춰져 있는 것이 은유법(metaphor)이다. 그리고 감춰지지 않은 것이 직유법(simile)이다.
피천득의 ‘인연’은 은유법이 많이 쓰여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비유법이다. 원시불교 최고(最古)의 경전이라고도 말하는 ‘수타니파타’ 경전에 이 말이 있다고 한다.
‘여서각독보행(如犀角獨步行)’이 그 말이며 당신은 ‘무소뿔(犀角)처럼 꿋꿋하고 사납게 혼자서 이 세상을 걸어가라’고 가르친 말이겠다. 같은 경전에서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고 비구(比丘)들에게 말한 것도 같은 비유법이다.
우리는 하나만 달린 코뿔소의 뿔과 그 소가 혼자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며 이를 통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상상한다. 또 뱀이 그동안에 자신이 걸치고 있던 허물을 다 벗어 버리고 기어가는 모습을 통해서 그처럼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혼자 외롭게 힘든 세상을 걸어가는 여인을 상상한다. 이것이 보조관념을 통해서 원관념에 도달하는 상상적 사고 형태다.
그런데 이것이 은유법으로 바뀌면 여기서 지칭하는 사람은 사라진다. 그래서 그처럼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연인도 친구도 다 인연을 끊어버리고 혼자서 살아가라는 여인을 상상으로 찾으며 읽어나가야 한다.
이때 ‘독자 스스로 그 숨겨진 원관념에 도달하게 될 때의 감동이 곧 아름다움이다.’라는 것이 바슐라르의 이론이다. 그리고 이 말은 문학이 지니는 예술적 기교의 핵심을 가장 훌륭하게 지적한 것이며, 우리는 이를 수필문학의 예술적 이론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나는 ‘그 겨울의 날개’에서 나비 얘기를 썼었다. 작은 종이 상자 속에 갇혀 있던 번데기가 날개를 달고 우화했지만 날지 못하고 상자 속에서 몸부림만 치다가 날개가 다 꺾이고 죽은 나비 얘기다.
이것은 내가 매우 힘들었던 시기에 날개가 꺾여버린 것처럼 되어버린 나 자신을 나비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어린 딸과의 대화 한마디를 마지막에 붙였다. 정원에서 발견한 번데기에 관한 얘기인데 그것이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딸은 알지 못한다. 은유법으로 말한 것이고, 또 딸은 당시의 정치현실까지 이해할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독자도 그것이 내 얘기라는 것을 그냥 알기는 어렵다. 그것 자체는 그냥 나비 얘기니까. 그렇지만 상상적 사고력을 작동시키면 독자는 그것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된다.
수필 전체가 이런 은유법이면 시가 된다. 그 대신 사실의 직접적 기록성과 이런 은유법을 함께 병행시키면 사실을 말하면서 상상의 문학 세계를 갖게 된다. 모든 문학은 당연히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니까 한국수필은 앞에서 말한 사상성 사회성 그리고 분단된 한반도 현실에서 문인이 해야 할 양심적 문제가 먼저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는 전문적 예술적 기법도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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