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스크랩] 반숙자의 `수필로 쓴 나의 수필론`?

칡뫼 2012. 10. 30. 13:15

 

반숙자의 '수필로 쓴 나의 수필론'

 

내가 동양화를 좋아하는 것은 넉넉한 여백 안에 사람이 있어서다. 자연이 아름다워도 거기 사람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 글쓰기의 중심에도 사람이 있다. “수필 속에는 분식되지 않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한 우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철저하게 나면 되는 것이다.” 어디선가 이 글을 읽었을 때 공감했다.

 

거울을 통해서 외양을 다듬듯이 수필은 내면을 성찰하고 바로 세우며 삶과 글이 하나로 엮어지는 인간학이라는 점에 매료되었다. 좋은 수필을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염원이 컸다. 수필은 다만 그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인도자라고 볼 때, 구도의 문학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심기가 불편하거나 누군가에게 미움이 있으면 글을 쓰지 못할 때가 많았다.

고심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다. 나는 나이면 되는데 그 이상을 요구하느라 수필쓰기가 어려워진다. 처음 수필을 썼을 때는 자신을 향한 우물파기였다. 들여다볼수록 흙탕물인 내면의 물을 퍼내고 새 물이 고일 때까지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물을 푼다는 것은 일종의 옷벗기 작업으로 심층에는 자기 연민과 자기애가 있었다.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돌보아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바로 나를 위해서 글을 썼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이 바로 독백문학인 수필이다. 이것이 출발이다. 십여 년을 쓰고 나니 이웃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나에서 너에게로 건너가는 전환점이었다. 나에 대한 연민이 주변으로 이동하고 자주 가슴앓이를 했다. 마음이 가닿는 곳에 그늘지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글을 쓰려면 그 글을 쓰게 하는 동인이 있다. 동인이 강할수록 단단한 글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정서적 충동이나 경이로움의 계기다. 어떤 대상에게서 충동을 받으면, 아니 마음에 큰 물살이 지면 그것을 글로 형상화하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갈망이 크면 클수록 글쓰기에 좋다. 그때 대상과의 밀애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충동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가 충동이 여과되면 글로 쓰라고 권하나 그 순간 써두지 않으면 못 배긴다. 생생한 현장감은 그때 얻어지는 것 같다. 다만 감정개입이 나타날 수 있고 덜 절여져 생경하기는 할지라도 의식의 심층에서 곧바로 쏟아져 나오는 지하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쓴 글은 발표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일단 써두었다가 조금씩 퇴고를 한다.

 

소재의 선택과 함께 주제가 잡히는 경우가 많다. 소재의 자기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재는 애정이 가는 곳에 있는 것 같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는지 모르나, 내 경우 정서적 교감이나 정의 어우러짐 속에서 글감을 발견하는 일이 많다. 꽃 이야기를 쓰거나 여행이야기를 써도 돌아오는 곳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나의 수필쓰기의 가장 중심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사례다. 발견한 글감에 뼈를 세우고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혀야 하는데 이때 문체에서나 내용에서나 독특한 개성이 나타난다. 바로 사유의 결과다. 문학에 있어 개성의 중요성은 자기만의 그 무엇이다.

 

소재가 선택되면 다음으로 제목을 먼저 잡는다. 제목을 잡지 못하면 글을 쓰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제목은 글이 다른 데로 빠지지 않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다만 제목은 쓰고자 하는 글감 속에서 쉽게 잡고 다 쓴 다음에 고치기도 한다. 이때 이미 마무리 글이 준비되는 경우가 많다. 의미화 부분이다.

 

서두는 현재의 느낌에서 출발한다. 내 수필이 귀납적 구성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쓰고자 하는 이야기로 곧바로 들어간다. 시가 심안에서 출발해 육안으로 나온다면 수필은 육안을 거쳐 심안, 뇌안, 영안으로 심화될 때 좋은 글이 써진다고 하나 쉬운 일인가. 다만 내 그릇에 충실할 따름이다.

 

글은 그 사람의 그릇만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릇을 키우는 일이 늘 고민이다. 심성의 그릇, 정서의 그릇, 지식의 그릇, 열정의 그릇을 키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과제인데 욕심을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분수에 맞는 소재를 선택해서 나만큼의 글을 쓰자고 다짐한다.

 

퇴고가 어렵다. 어떤 사람은 수백 번까지 퇴고를 한다는데 열 번쯤 읽고 세 번쯤 복사해서 고치고 나면 내 글에 내가 질려버려 더 뒤죽박죽이 될 때가 있다. 끈기가 부족한 탓이나 고쳐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문장에 자신이 없는 것이 바로 퇴고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버릇 중에 하나가 글을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물음이 있다.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스스로에게 정직한가, 읽는 이들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는가.

 

그동안 글을 쓰면서 메모를 많이 했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메모장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사용한다. 다음에는 작가노트가 있다.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적어두는 것이다. 여기에는 감성의 치기가 있고 비밀이 있고 사건이 있다. 또 한 가지는 창작교실에서 강의를 하면서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자료들을 적어 놓은 강의 노트가 있다.

 

수필을 쓰는 것은 가을에 석류가 익어 저절로 터지는 그런 과정이 글로 생성되고 숙성되고 완성되는, 바로 글감이 내 안에 고여 와서 흘러넘치는 자연스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어휘연마에 대하여

 

 

원고 청탁서에 특별히 주문한 어휘연마에 대하여는 특별한 것이 없다. 작가들이 글을 쓸 때 15매 글에 1,500개가 넘는 단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고 600개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어휘를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문장을 쓸 확률이 높다 하겠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 문장에 맞는 정확한 어휘를 선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 경우에는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고 처음 떠오르는 어휘를 쓴다. 감각적인 문장을 쓰는 작가들이 부럽지만 따라가기에 요원하니, 알고 있는 편안한 어휘로 쓴다. 하루에 한 단어를 익히자는 결심을 한 때도 있었다. 메모 노트에 단어를 적고 읽어 보는 것, 그것만 열심히 해도 일 년이면 단어 365개를 확보하는 것이니 쉽게 볼 일은 아니다.

 

거실이나 자주 머무는 공간에 작은 국어사전을 놓아두고 짬이 날 때마다 보는 것도 좋고 가방에 넣고 다니며 누구를 기다린다거나 무료할 때 눈에 들어오는 단어를 익혀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독서를 많이 한 사람들의 어휘능력이 뛰어난 것은 글에서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어휘나 문장에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다. 때로는 옮겨 써보기도 하지만 계속하지 못하고 창작생활에서 70%는 책을 읽는 데 쓰고 30%는 창작에 쓰려고 노력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이로써 나의 수필쓰기 고백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처음에 나로 출발한 글이 너로 옮겨가고 이제는 우리라는 사회공동체, 인류공동체의 관심사로 경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과제다.

 

나는 지금까지 수필을 쓰면서 많이 행복했다. 쓰는 과정이야 힘들지만 쓰고 나서 오는 충만감은 삶의 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가 없고 사람만큼 신비스러운 존재도 없다. 비록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지라도 사람을 떠나서는 나의 존재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는 현존감 만큼 나를 즐겁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게 없지 싶다. 매사에 욕심을 접는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후회하는 일을 줄여가며 부족한 대로 삶과 글이 하나이기를 소망한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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