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행사에서 제 강의를 들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연히 몇 년 전에 썼던 글을 만나서 한번 올려봅니다.
아래 글은 피천득 선생님을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그분이 사랑하시는 에세이를 승화시키기 위한 헌사의 글로 이해해 주십시오.]
피천득 선생을 위하여 / 김홍근(문학평론가)
에세이는 청자연적이 아니다.
에세이는 난이나, 학이나,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 아니다.
에세이는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 아니다.
에세이는 이제 마냥 가로수 늘어진 깨끗한 주택가의 포도가 될 수만은 없다.
에세이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들이 독점하는 글이 아니다.
누구든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의 것이다.
에세이는 불꽃 튀는 문학이지,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신변잡기가 아니다.
에세이는 흥미를 주기보다는, 읽는 사람을 찌른다.
에세이는 마음의 산책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실존의 모순이 그려내는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뿜어져 나온다.
에세이는 빛깔이 언제나 온아, 우미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대책 없이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며, 검거나 희기도 하며, 퇴락하여 추하기도 하다.
에세이의 빛은 비둘기 빛이나 진주 빛일 수만은 없다.
에세이가 비단이라면, 때로는 민무늬에 강한 톤이 있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백지처럼 하이얀 것이기도 하다.
만일 무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 얼굴에 미소를 뜨게 하기보다, 망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하게 하거나, 갸우뚱 고개를 젓게 만든다.
에세이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어정쩡하게 우아한 것을 싫어한다.
산뜻하기 보다는 차라리 날카로운 문학이 되고자 한다.
시대가 아픈데 홀로 고상하기를 원치 않는다.
에세이의 재료를 생활경험이나 자연관찰에 한정한다면, 존재의 깊이를 표착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심정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에세이가 써지는 것' 이라는 기존의 세설에 속는 한, 좋은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세이는 가슴에 다는 브롯지가 아니라, 말더듬이가 기어이 토해내는 한숨이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때로는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를 한다.
갈수록 수필과 꽁트의 경계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필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에세이의 행로가 아니다.
차라리 그 필자마저도 비고, 대신 누군가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는 것이 윗길이다.
문학은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사치가 아니기에, 차의 향에 집착하는 멋을 부리지 않는다.
에세이는 독백이 아니다.
천지만물과의 대화다.
연약한 상대적 존재가 무한한 절대와 부닥치는 기적을 적나라하게 기록하는 사랑타령이다.
에세이는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 처럼 사적이기보다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무아 속으로 녹아버리는 광막한 우주이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인생을 너무 우습게 보는 말이다.
여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없으니까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연꽃은 맑은 물이 아니라,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핀다.
여유가 글을 쓰게 하는 게 아니라, 글이 우리를 구원해 준다.
에세이가 덕수궁 박물관 청자연적의 정연한 꽃잎 중 옆으로 꼬부라진 하나의 파격이라는 비유는 멋있다.
하지만 이제 이 땅의 에세이는 그런 멋놀음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에세이는 '깨진' 청자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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