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장영희
몇 년 전인가 십대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 중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사가 대충 이랬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다.”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이도 모든 일이 잘되어 나갈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짜 호박은커녕 내 몫도 제대로 못 챙겨 먹기 일쑤냐는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게 내 탓이 아니라는 거다. 순전히 운명적인 불공평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벤츠 타고 탄탄대로를 가는데, 나는 펑크난 딸딸이 고물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나도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가 많다. 한 예로 내 열쇠고리에는 겉으로는 구별이 안 되는 열쇠가 두 개 달려 있는데, 하나는 연구실, 또 하나는 과 사무실 열쇠이다. 열쇠에 유성 펜으로 방 번호를 표시해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러기도 귀찮고 또 그냥 재미도 있고 해서 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둘 중 아무거나 꽂아 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수학적으로 따져 볼 때 확률은 분명히 반반인데, ‘하필이면’ 연구실 열쇠가 아니라 거의 과 사무실 열쇠가 먼저 손에 잡혀 두 번씩 열쇠를 돌려야 하는 일이 열이면 아홉이다.
그뿐인가. ‘하필이면’ 큰 맘 먹고 세차한 날은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무엇을 사기 위해 줄을 서면 바로 내 앞에서 매진되고.
더욱이 얼마 전에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내 어깨에 새똥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 한동안 서서 나의 ‘하필이면’ 운명에 경악했다. 2천만 서울 인구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텐데 ‘하필이면’ 그게 나라니!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하필이면’도 있다. 남들은 멀쩡히 잘도 걸어다니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느냐 하면 노래, 그림, 손재주 그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재능을 골고루 나눠 주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필이면’ 나만 깜빡하신 듯하다.
언젠가 치과에서 본 여성지에는 모 배우가 화장품 광고 출연료로 3억 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3억이면 내가 목이 쉬어라 가르치고 밤새워 페이퍼 읽으며 10년쯤 일해야 버는 액수인데, 여배우는 그 돈을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다.
그건 재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타고난 생김새 때문인데,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대로 꽤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커녕 3백 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 가지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3백 원도 못 받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내게 한심하고 슬픈 말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내게 던진 ‘하필이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 곰 인형을 하나 사서 아름이에게 갖다 주자 아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하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나 사촌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한데, 뜻밖에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이 나름대로 고마움 표시였다.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아름이가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예였지만,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 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무슨 권리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가. 또 나보다 머리 좋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게다가 실수투성이 안하무인인데다가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장영희를 ‘하필이면’ 왜 많은 사람이 도와 주고 사랑해 주는가(우리 어머니 말씀으로는 양순하고 웃기 좋아하는 내 성격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잘빠진 육체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타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필이면’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창문을 여니, 우리 학생들이랑 일산 호수공원에 놀러 가기로 한 오늘, ‘하필이면’ 날씨가 유난히 청명하고 따뜻하다. **
|작|품|감|상|
‘좋은 수필’ 감상
<하필이면>-장영희
박 재 식
❍ 머리말
작자인 장영희(張英姬, 1952~2009)는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이다. 역시 영문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부친 장왕록(’91년 작고) 박사와 소아마비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조차 못한 그를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등에 업고 통학시킨 평생의 보호자 어머니 이길자 여사 사이 1남 5녀 중 둘째 딸로 서울에서 태어난다. 두 다리를 못 쓰는 1급장애자로 평생을 목발에 의지하여 산 그는 ’75년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77년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85년에는 미국 뉴욕주립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모교인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 재직중에 향년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09년 5월 간암으로 서거하자 국내 매스 미디어는 일제히 그의 생애에 대한 자취를 기리며 애도하는 기사를 대서 특필로 보도했다. 그러나 그의 남다르게 두드러진 생애 행적은 이미 생전에 장애우의 귀감으로, 또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안겨 주는 지성의 메신저로 늘 밝은 웃음을 띤 초상과 함께 널리 세인에게 알려진 터이기도 하다.
미상불 장영희의 남다른 생애는 마치 부실한 꽃대가 피운 한 송이 아름다운 꽃과 같은 기적의 삶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1급장애 부실한 신체적 조건을 이기고 깔축없는 학업 과정과 박사 학위까지 마치고 대학의 유수한 영문학 교수가 된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한층 돋보인 것은 이런 기특한 성취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국내 여러 일간지를 통해 에세이성 칼럼을 연재하여 빼어난 문필적인 소양을 드러내고, 특히 ≪샘터≫지에 <새벽 창가에서>라는 표제 고정 칼럼을 통해 주로 부정적인 운명을 극복해 온 자신의 정신적인 체험을 기조로 하여 참다운 인생이 갖는 행복과 희망의 의미를 주제로 한 수필을 연재함으로써 독자의 공명과 심금을 울린 문학적인 작품 활동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01년 유방암을 시작으로 척추암, 간암을 차례로 앓은 9년간 가혹한 투병 생활 중에도 의연히 붓을 놓지 않고 이전에 못지않은 왕성한 저작 활동을 지속한 초인적인 행적은 세인의 마음을 숙연케 한 바가 있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이같은 초인적인 힘의 연원을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의지나 노력의 소산이 아닌 “본능의 힘”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대학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 ≪미국인≫이라는 책에는, 한 남자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그의 마지막 저서이자 유작집이 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의 생애에 일관한 삶에 대한 철학의 표백이자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한 모티브와 주제의식의 실체를 말해 준 대문에 다름 아니다.
그가 남기고 간 저서는 숱하게 많다. 전공인 영문학의 소양을 바탕으로 낸 영미 문학작품 번역과 해설서는 말할 것도 없고, 김현승 시집을 영역하여 ‘한국문학번역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뭣보다 대중적인 성가를 모은 책은 두 권 창작 수필집이다.
2000년 첫 수필집으로 낸 ≪내 생애 단 한번≫(‘샘터사’ 간)은 이미 50쇄를 넘어설 만큼 장기간 베스트스테디가 되었고, 그의 운명 직후에 발간된 유작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09년 ‘샘터’사 간)도 지대한 인기 속에 쇄를 거듭할 기세이다.
감상할 <하필이면>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수필적인 형식과 기지를 돋보인 글로 ≪내 생애 단 한번≫ 첫머리에 수록된 수필이다.
❍ 해설
이 글은 ‘하필이면’이라는 부사가 사용되는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통해 자아상自我像의 정체를 해학적으로 모색한 철학성 수필이다.
작자는 짓궂은 운명의 조화를 ‘하필이면’이라는 표현례表現例에 잡고 10대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 가사를 화두로 삼는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한 노래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이도 모든 일이 잘되어 나갈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짜 호박은커녕 내 몫도 제대로 못 챙겨 먹기 일쑤냐는 것이다.
소외감이나 패배의식은 상대적인 비교에서 오는 자격지심이다. 그런데 내가 남만 못하고 불행한 것은 내 탓이 아니라 순전히 불평등한 외적 조화의 탓이라고 여길 때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회적인 부조리에 기인한다고 보면 계급의식이나 혁명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자기 혼자만의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시킬 때 “왜 하필이면 나만” 하고 팔자소관으로 돌려 한탄할 밖에는 없다. ‘머피의 법칙’은 이런 운명론자 심리를 꼬집은 운수 타령에 불과하다. 미상불 작자도 살아가면서 ‘머피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한 예로 내 열쇠고리에는 겉으로는 구별이 안 되는 열쇠가 두 개 달려 있는데, 하나는 연구실, 또 하나는 과 사무실 열쇠이다. 열쇠에 유성 펜으로 방 번호를 표시해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러기도 귀찮고 또 그냥 재미도 있고 해서 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둘 중 아무거나 꽂아 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수학적으로 따져 볼 때 확률은 분명히 반반인데, ‘하필이면’ 연구실 열쇠가 아니라 거의 과 사무실 열쇠가 먼저 손에 잡혀 두 번씩 열쇠를 돌려야 하는 일이 열이면 아홉이다.
확률을 크게 벗어나는 일은 운수의 불공정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뿐이 아니라 모처럼 큰 맘 먹고 세차한 날은 맑은 하늘에서 비가 오는가 하면, 무엇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면 바로 자기 앞에서 매진된다. 한번은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어깨에 새똥이 떨어지는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다. 작자는 어이가 없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1천만 서울 인구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텐데 ‘하필이면’ 그게 나라니!” 하고 망연자실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머피의 법칙’에 견주어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인 운수의 조화로 치부할 수 있지만, 작자에게는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하필이면’이 있다.
남들은 멀쩡히 잘도 걸어다니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느냐 하면 노래, 그림, 손재주 그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재능을 골고루 나눠 주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필이면’ 나만 깜빡하신 듯하다.
물론 “깜빡하신” 것은 아니다. 현실로 작자는 잘 팔리는 월간 잡지 포퓰러 작가로 글을 연재하는 필재의 소유자이지만, 다른 어떤 유능한 작가처럼 펜을 잡으면 일기가성으로 글을 쓰는 재능을 갖지 못했다고 자신을 비하한다. 이것은 그만큼 자기 글쓰기가 신중을 기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천부의 장애자가 된 불공평한 운명의 조화와 연쇄하여 그 사실을 강조하는 대구적對句的인 구실을 한다.
그리고는 어느 여배우가 화장품 광고 출연료로 3억 원을 받았다는 여성지 기사를 읽고 불공평한 세태의 거품 현상을 꼬집는다. 3억 원이면 교수인 작자가 목이 쉬어라 가르치고 밤새워 페이퍼에 매달려 읽고 쓰며 10년 쯤 일해야 버는 돈인데, 그 돈을 여배우는 단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다.
그건 재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타고난 생김새 때문인데, 그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대로 꽤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커녕 3백 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 가지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3백 원도 못 받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작자에게는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한심하고 슬픈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작자 장영희는 평소 천형天刑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할 만큼 자신의 신체적인 장애에는 구애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과 ‘희망’이라는 정신적인 지표를 보람 삼아 언제나 긍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정서와 지성의 소유자이다. 그러므로 ‘하필이면’이라는 말이 갖는 운명의 부정적인 속성의 나열은 그와 같은 자아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설정한 역설적인 전주곡에 불과하다.
아무튼 작자가 하필이면 ‘하필이면’이라는 제재로 글을 쓰게 된 아이러니컬한 동기는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사건에 있다. 작자가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 곰 인형을 하나 사서 주자 눈이 똥그래진 아름이가 “다른 형제나 사촌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한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나름대로 고마움의 표시로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한 것이다. 그래서 작자는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 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하고 짓궂은 운명의 악몽에서 깨어나 홀연히 진정한 자아의 긍정적인 세계로 돌아온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무슨 권리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가.
이렇게 가정적으로 혜택받은 행복한 운명을 필두로, 세상에는 “나보다 머리 좋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하고많은데 왜 ‘하필이면’ 자기가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교수로서 지체에 대한 충만감을 섬기고, 게다가 하는 짓이 어쭙잖기만 하고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자기를 “‘하필이면’ 왜 많은 사람이 도와 주고 사랑해 주는가.” 하고 따뜻한 세정 속에서 소외감 없이 살아가는 행운을 꼽으면서 그것이 “양순하고 웃기 좋아하는 내 성격 때문”이라는 어머니 견해를 좇아 “그렇다면 잘빠진 육체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일찍이 3억짜리 여배우의 ‘잘빠진 육체’에 견주어 3백 원짜리로 폄하한 ‘아름다운 영혼’의 평가를 절상한다. 그리고는
‘하필이면’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하고 깨치면서, 문득
창문을 여니, 우리 학생들이랑 일산 호수공원에 놀러 가기로 한 오늘, ‘하필이면’ 날씨가 유난히 청명하고 따뜻하다.
하고 단원을 맺는다.
❍ 후평
문학 장르 중에서도 특히 수필을 두고 말할 때 ‘글은 곧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글을 읽으면 인간 장영희참모습을 그 생애와 함께 바로 가까이에서 보는 느낌이 드는 수필이다.
글의 중심 포인트가 되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달리 하거나 달리 되지 않고 어찌하여 꼭’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 보편적인 기대나 예상에서 어긋나는 현상이 생겼을 때 ‘왜 공칙히도’ 하고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작자 조카가 다른 조카들을 두고 자기에게만 주어진 선물을 받고 다소 ‘부적합한’ 대로 뜻밖에 기쁨 표시로 사용한 것처럼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이렇게 ‘하필이면’이라는 표현이 갖는 이중적인 의미 속에 작자는 자신이 타고난 운명과 삶의 모습을 투사하여 묘사한 글이 수필 <하필이면>이다. 정작 작자는 세상의 많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운신하는 가운데 ‘하필이면’ 불구 몸으로 태어나 목발에 의자해 살아가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세상에는 빈곤과 무지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유복한 가정에서 명석한 두뇌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로 태어나 유수한 대학 교수와 문필가로 행세하며 추앙받는 이중의 운명적인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작자는 그 두 운명에서 전자의 불행을 사상捨象하고 후자의 행운을 취하여 삶의 본질로 삶고 그것을 글로 써서 희망과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메시지가 한층 감명적인 진실로 리얼하게 와닿는 요인은 여느 필자와는 달리 전자의 불우한 운명과 더불어 작용하는 상승 효과에 있는 사실도 배제할 수 없지만, 거의 완벽한 경지로 구상된 수필적 기법이 자아내는 문학성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전자의 부정적인 명운을 다루면서도 마치 남의 얘기라도 하듯 담담하게 엮어가는 문장 속에 번득이는 기지와 해학기법은 가히 수필가로서 장영희 진면목을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는 작품이다. **
Ⅰ. 약력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거주
1928년 경남 진주(晉州)에서 출생
1941. 진주봉래초등학교 졸업
1943. 도일(渡日), 동경에서 중학 입학.
1945. 해방으로 귀국, 경남상고 편입
1948. 동인지 『문학청년』에 시와 단편소설 발표
1949. 홍익대학 국문학과 입학. 현대출판사 근무
1950. 경찰전문학교 입교
1962. 단국대학 법과 졸업
Ⅱ. 문단 활동
1954. 월간 『새가정』에 첫수필 「나의 잊을 수 없는 소녀」 발표
1970. 『부산일보』에 칼럼 연재
1974. 『월간문학』에 수필 「나의 잊을 수 없는 소녀」발표
1977.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충북지부장
1986∼98.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수필문우회 회원.
저서:
1982. 『바람이 머물고 간 자리』
1988. 『열려 있는 창』
1997. 『대장닭』
1999. 『짝사랑』(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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