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스승은 어느 분일까. 알고 보면 학창시절 좋은 가르침을 준 은사님이 다 스승이시다.
인생의 스승 또한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의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다.
내 그림에 스승이 있었던가. 직접 붓 잡아 그리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 스승을 닮는 그림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에.
대신 미술서적과 박물관 미술관에 걸린 수많은 그림이 나에겐 큰 스승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낙서하듯 가슴의 응어리를 글로 써 보았다.
글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러하듯 글 또한 녹녹한 게 아니었다.
그림이야 30여 년 좌충우돌하며 지낸 세월의 힘으로 그린다지만 글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제멋대로 나열한 감정의 파편을 정리하는 일. 맞춤법이며 어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거듭나기.
심성을 드러내는 글의 가치. 삶과 문학의 문제. 특히 글의 진정성. 모든 것이 열정만으론 힘든 일이었다.
그렸다고 그림이 아니 듯 쓴다고 글이 아니었다.
특히 수필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글을 통해 사람 사는 도리도 배웠다.
그 분이 수필가 손광성 선생님이시다. 가슴 떨며 읽었던 선생님의 작품 <하늘잠자리>와
고마움의 표시로 선생님의 초상을 그려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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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잠자리
손광성
가을 하늘에 홀연히 나타난 한 무리의 하늘잠자리. 참 가볍다. 얼마를 덜어 내야 저만큼 홀가분할 수 있을까. 중력조차 따돌린 가붓한 부상. 내장을 토해 낸 듯 홀쭉한 배, 햇빛을 투과시켜 버리는 삽상한 날개.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은 없다. 투명하다.
투명한 것들은 자주 침묵한다. 무엇을 더 해명하랴. 이미 속속들이 들켜 버린 것을. 말을 입는 순간 자명한 진실도 모호해져서는 뒤뚱거리게 되는 법. 종파에 관계없이 수행의 기본이 묵상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늘잠자리의 침묵은 그러나 고행승의 그것처럼 무겁지 않다. 맑고 밝고 가볍다. 이루려는 자의 침묵이 아니라 이룬 자의 침묵 같은 것. 그런 회심의 침묵에서는 언제나 맑은 향기가 난다. 모진 겨울을 견뎌 낸 가지 끝에 비로소 핀 한 송이의 매화처럼.
날고 있다. 파란 하늘 속을 꿈꾸듯 날고 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나부끼는 우리의 꿈과 사랑과 희망처럼, 꼭 그만한 높이에서 한 마리의 하늘잠자리가 날고 있다. 땅이란 험한 현실을 딛고 서기에는 여섯 다리로도 불안하단 말인가. 아니면 결코 발에 흙을 묻히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일까. 허공에 의지한 채, 하늘잠자리는 공중 부양에 취한 듯 도무지 내려올 생각이 없다.
죽어서도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잠자리들의 숙명. 죽어서도 꿈을 접지 못하는 자들의 비애. 선택이 아니라 운명일 때 꿈도 이상도 분명 고통일 테지만, 단 한 번의 눈이 시린 아득한 비상을 위해서라면 한 백 년쯤 잘 참고 견뎌 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나 모든 가벼운 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꽃향기처럼, 물안개처럼, 살아서 고단했던 어느 한 사람의 나직한 숨결처럼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낯가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조차 미안하단 말인가. 찬바람이 이는 어느 가을 석양 무렵, 파란 침묵을 한 자락 끌며 허공으로 사라지고 마는 하늘잠자리의 아득한 소멸. 그 깨끗한 소멸이 눈부시다.
수필가 손광성 선생님 펜화 칡뫼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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