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를 다녀와서

그림이야기--안면도

칡뫼 2009. 10. 6. 18:48

 

                  추억이 담긴 그림 한 점               /  칡뫼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처가를 찾았다. 장모님께 인사드리고 웃옷을 벗으려고 건넛방에 들어서자 벽에 낯익은 그림이 보였다. 아주 작은 그림 "안면도"였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림을 만나니 어린 시절 소꿉친구 만난 듯 반가움이 앞섰다. 

 "아니 이 그림이 어떻게 여기 있지"

내 물음에 연애시절 내가 선물했던 작품이란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림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케치형식으로 그렸던 이 그림은 멀리에는 길게 늘어선 섬이, 가운데에 고깃배와 점점이 박힌 김발장대, 그리고 가까이엔 섬에서 고깃배를 향해 인사하는 사람이 그려진 아주 작은 그림이다. 그림 속 풍경이 나를 삼십 년 전으로 끌어 들였다.

   

    이십 대 나이였던 팔 십년대 초, 군에서 제대 후 인생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던 나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림에 뜻을 두고 스케치여행을 자주 다녔었다. 아마 그때 쯤 안면도를 찾았지 싶다. 때는 봄을 앞에 둔 늦은 겨울 쯤으로 기억된다. 가늘고 긴 안면도는 버스를 이용하고 섬 끝 영목에서 배를 타고 대천으로 간 다음 기차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서울서 출발한 나는 짧은 겨울해로 어둠이 깔린 시간에서야 겨우 안면도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차로 도착한 종점은 영목항 한참 못 미쳐 있었다. 걸어야 했다. 시간에 쫒기지 않고 오전에 배를 타려면 영목포구에서 잠을 자야했다. 또 한편 아침바다가 보고 싶기도 했고 포구풍경을 그림에 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캄캄한 밤길을 잰 걸음으로 내달았다. 같이 내린 안면도 주민이 하나 둘 주변으로 사라지고 밤길을 홀로 걸어 도착한 영목항, 그곳에는 허름한 불빛 아래 서울여관이 있었다. 마주하고 또 다른 여관이 하나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내가 잠을 청한 곳은 서울여관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집 저집 망설이다가 제가 서울서 왔기에 여기 들어오게 됐어요."

하고 주인어른께 말씀드렸던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 여관에서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었는데 당시에는 여관비에 밥값이 얹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예쁘장한 아가씨, 지금 생각해보니 고교생 소녀였다. 아침상을 차려 살포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때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총각이 낯선 처녀가 들고 오는 밥상을 처음 받아보는 분위기는 어찌나 야릇 민망하던지. 한편 좋기도 했던 기억이 삼삼하다. 문학작품 속 사랑방 손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 후에도 가끔 생각이 나곤 했다. 그때 차려진 정갈한 밥상에는 젓갈류며 각종 해산물이 듬뿍했다. 파래 김은 어찌나 맛있었던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입에 군침이 돈다.

   "광천 김이 파래가 많던데 여기도 그러네요."

지금 생각해봐도 여태껏 먹어보았던 많은 밥상 중 몇 안 되는 멋진 식사였다. 아마 예쁘장한 섬 처녀가 들고 들어온 상차림이라 그랬지 싶다. 

    

   식사를 마치고 여관을 나와 선창가로 향했다. 바닷가의 비릿한 내음과 갈매기 울음소리, 좋은 날씨를 예감케 해주는 엷은 바다안개가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저기 널어놓은 파래 김, 이곳저곳 쌓여있던 굴 껍질 ,고기잡이 배 ,아름다운 포구풍광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포구에 다방이 하나 있었다. 들어서니 주인여자인지 대걸레로 마루바닥을 닦고 있었다. 삐걱이는 나무마루 틈새로 바닷물이 보였다. 바닷가 모래위에 세운 선창가 다방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창 너머 바다경치에 취했었다. 나에게는 그때가 낭만의 시절이었지 싶다. 흘러나오는 구식전축의 노래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었나, 아마 그 노래가 제격이라는 지금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다방을 나와 길을 걸었다.  흰 벽에 빨간 지붕을 한 교회당이 언덕 위에 있었다. 안개가 걷히고 눈부신 햇살에 반짝이는 교회당 모습은 그림엽서 풍경이 따로 없었다. 바다 쪽을 바라보니 멀리 섬이 보이고 점점이 꽂아놓은 김발 장대가 보였다. 그 사이로 물결을 연꼬리처럼 달고 달리는 작은 배는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돌아와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 소품 '안면도' 바로 이 작품이다.

  

    그 뒤 십 수 년이 흘러 가정을 꾸린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영목항을 찾았다. 그곳 서울여관이 있던 자리에는 2, 3층 됨직한 빌딩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1층은 음식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그곳을 찾아가 식사를 했다. 꽃게찜을 아내와 아이들이 어찌나 맛있게 잘 먹던지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행복하다.  많이 늙으신 주인아주머니가 계셔 혹시나 하고 여쭈어 보았다.

   "십 수 년전에 이곳에 왔었는데요, 혹시 여기가 서울여관자리 아닙니까 ?" 

  " 네, 맞아요 서울여관, 제가 쭈-욱 이집에서 살았죠."  

나는 반가움에 다시 

  " 아! 그래요 혹시 그때  예쁘장한 따님이 계셨던 것 같은데." 

  " 아! 우리 딸애요  저기 와 있잖아요." 

가르키는 곳을 보니 장난감 들고 천방지축 노는 아이와 간난아기를 안고 젖 먹이는 젊은 아낙이 있었다. 주인장은 딸이 일요일이라 친정집에 다니러 왔단다 . 바로 그 소녀였다. 섬 집 소녀는 두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손님이었던 나도 아버지가 되어 가족을 데리고 안면도를 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저 애기엄마가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그 안면도 소녀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섬을 가족과 다녀온 지 십 수 년이 다시 또 흘렀다. 그러니 안면도로 스케치여행을 갔던 때가 벌써 삽 십여 년 전 일이 되었다. 추억은 빛이 바랬고 한동안 잊어 기억조차 없었지만 그림을 다시 본 나는 그림 속 풍경 때문인지 생생하게 과거의 일이 오늘 일처럼 되살아 났다.  추억이 작은 그림 속에 커다랗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안면도                1982 년작                               화선지 수묵담채                                칡뫼

 

 

하나의 작품은 그림을 그린작가에게 작품에 나타나는 시각적 모습외에 

그림 제작당시를 떠올리게 해  또 다른 감흥을 얹어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자신의 감정을 싣는 모든 예술장르의 작품은 

지나서 보면 추억의 깊이가 그 어느것 보다 깊다    --칡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