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허 이태준의 <무서록>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육상에서 백미 혹은 천미 선수가 ‘마라톤이 인기 있다 하여 백미에 적당한 자기 체질을 무시하고 마라톤에 나서면 거기에 남는 것은 무엇일 것인가?
유정이나 이상은 다 자기 체질에 맞는 종목을 뛴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 작품에는 자신이 있다. 기질에 맞는 것을 쓴 작가에게는 상식 혹은 개념 이상의 창조가 있다.’
이 글은 김유정과 이상의 추도회를 치르고 쓴 글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중에 나오는 대목이다. 답은 모파상의 글에서 인용한 다수 대중이 원하는 것( 즐겁게, 슬프게, 감동, 공상, 포복절도, 전율, 사색, 위로 등등)이 아닐지라도 그중 소수의 독자가 원하는 것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것을 지어 달라’이다
이 말을 옮겨보면 유행이나 사조에 휘둘려 자신의 기질을 외면하고 많은 대중이 선호하는 곳에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기질이 원하는 것이 극소수의 독자가 있는 곳일지라도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태도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질이 대중이 선호하는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점은 좀 더 생각해 볼 대목이다.
이 글은 당연히 미술에도 적용되겠다.
난 과연 이 말에서 자유로운가?
불행하게도 나의 기질은 대중이 선호하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결론 적으로 나의 기질도 여태껏 찾지 못했다. 늘 부끄러울 뿐이다.
-작업 중 빗소리를 듣다가-
철원에서
162X112cm
한지먹채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