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읽기

[스크랩] <에세이문학> 가을호에서 두 편의 작품을 읽고

칡뫼 2012. 9. 25. 18:41

    

           < 에세이문학 >가을호에서 두 편의 작품을 읽고

                

                                                                                                                                김형구

         마당, 마른 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깃동잠자리 날개가 유달리 처져 보이던 9월 오후. 반갑게 전달된 <에세이문학> 가을호를  봅니다.  새 책을 대할 때마다 일부러 코를 대고 (눈은 감을 때도 아닐 때도 있습니다책의 향기를 맡아보곤 합니다. 책에서 풍기는 종이냄새 잉크냄새는 묘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켜 향기 이상의 또 다른 행복감을 가져다 줍니다.

         냄새를 맡는 것으로 책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저는 책장을 넘깁니다. 이제 독자(맘대로 해석하고 맘대로 느끼는)가 되는 거지요. 책이란 숲을 내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죠.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덮고 싶으면 덮습니다. 책을 읽는 순간 나만의 자유를 느낍니다. 가끔 저를 붙드는 작품을 만나곤 하는데. 어찌 보면 좋은 글 훌륭한 작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목을 받느냐 아니냐의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모든 예술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데 이 점은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넘기며 몇 편을 읽었습니다.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제 눈을 붙드는 두 편의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실린 순서대로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이혜연 작가(존칭생략)<고독의 조건>과 박경주 작가의<벌새 크리킨디 이야기> 입니다. 그러고 보니 년 전에 말씀 드린 두 작가가 또 되고 말았네요. 그래서 이 글을 쓰기 망설였습니다. 앞쪽에 자리한 원로들의 작품이야 구면인 것도 많다 보니 뒤로 미루고 제가 아는 작가의 신작 에세이에 눈이 간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눈이 가면 갔지 지나칠 수도 있는데 왜 그럼 제 눈이 붙잡혔을까요.

       작가가 써 놓은 작품,  글의 형상이랄까 모습을 보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자신이 살아 온 옛날이야기를 이끌어 내어 자기의 생각을 보이는 글, 어떤 사물을  성찰하여 우리의 삶을 비견해 보여주며 작가의 본의를 표출하는 글, 주변에서 보거나 경험한 상황에 덧대어 작가의 인생철학이나 사회관을 심어 내보이는 글, 또는 아름다운 형상이나 장면 분위기를 그저 그림 그리듯 보여 주는 글 등 몇 가지 형태로 분류, 분석할 수 있지만 사실 하나의 작품에는 모든 것이 알게 모르게 어우러져 있지요. 이해하기 쉽게 나눈 이론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순서대로 읽다보니 사실 제목이 저를 붙들었는데 멋져서도 아니고 단순한 이유였죠. <고독의 조건>은 고독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정말 어려운 이야기 고독을 과연 어떻게 조건을 걸어 풀어냈을까. 두 번째 벌새 크리킨디 이야기>는 벌새를 크리킨디라 하나보네, 어떤 종류의 벌새일까. 꽃 이름을 알 듯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작가 박경주의 글은 짧기도 했고요. 그런데 읽고 보니 독자인 저에게도 참으로 많은 할 이야기가 생기더라고요.

        생명이란 존재는 살다보면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즉 돈, 명예, 직장 등 어느 정도 구체적인 것도 있지만  사랑, 외로움, 그리움, 고독, 설명할 수 없는 행위로 도출되는 그 무엇.  인간 본연의 감정이랄까 영혼의 문제와 맞닥뜨리기도  하죠.

        그 중 두 작품은 고독행위, 그 내면의 본질 다뤘고 어쩜 구체적이건 에둘러서 건 이야기해 보려고 한 작품이라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더군다나 저에게 또 다른 사유를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독자에게 사유의 진화를 가져오게 하는 씨앗를 퍼뜨리는 작가는 자기만의 독자를 만들죠. 재미가 됐건 이미지가 됐건, 그 사유를 발아시키는 씨앗이 진정 작품의 본질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걸 통칭해 감동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두 작품은 접근 방식은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 하고픈 이야기를 하기위해 우선 같이 논하기 보다는 나누어 느낀 감상평부터 적어 보겠습니다.

            

      <고독의 조건>

       작품은 시작부터 연로한 어머니와 헤어지는 장면인데 작가의 냉정함 아니 보기에 따라선 매몰찬 모습이 드러나죠. 이어 등장하는 이야기는 소설의 한 대목인데 역시 그림이 그려집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 글의 앞부분에 상황을 두 개나 동원했습니다. 어찌 보면 뒤에 할 이야기(독자에 따라선 이해하기 힘든 작가의 사유)를 그나마 쉽게 풀어 보려는 작가의 구성력이라 보여 집니다.

        첫 문단의 행위에 대한 작가의 변명, 아니 해명을 두 번째 문단을 활용해 설명한 면도 보입니다. 이어 작가의 말이 등장하는데 죽음이건 아픔이건 이 세상 것은 철저하게 개별적이란 말을 합니다. 천륜지간 까지도. 작가는 이쯤에서 서서히 고독의 조건을 하나씩 부각시키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다시 인과관계가 없는 파리 생활에서 고독을 즐기기까지 하는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결국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쓰디쓴 고독의 맛을 달콤하게 즐기다가 달콤함이 사라지자) 귀국하게 되는 장면이 연출되네요. 그러면서 이태준 선생의 글을 인용하며 외로움에 대한 사유로 작가의 생각 고립, 고독을 설명합니다관계로 인해 일어나 관계에 의해 소멸되는 존재의 공허함. 작가는 이 말이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현대인만큼 많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일은 유사 이래 없지 싶습니다. 하지만 모두 외롭다고 하는 현상, 작가의 시선이 여기에 있음을 봅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죠. 빈집을 지키던 어둠은 사라지고 무엇이 들어설까요. 어머니나 작가 모두에게 외로움이 찾아오죠. 고독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외로움이 쓰다, 라고 하면서도 안도감이 든다 했습니다. 고독이 어느 정도 몸에 익숙한 경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고독은 아직 맛이, 있다 적었네요. 전 이 말에 넘어질 뻔 했습니다. 맛이 있다 아니고 맛이, 있다 입니다.

       결국 고독이 익숙하지만 아직 (쓰고 아린맛이 남아 있어 다행이 아닐까 스스로 위로하는 작가의 독백으로 들립니다. 맛이 없거나 못 느낀다면 존재가 상실 되는 상태겠죠. 이 복잡한 이야기를 쉼표하나로 정리해 버렸네요. 작가의 글재와 연륜이 보이는 대목입니다. 결국 이 말미가 글의 여운을 길게 끌어주며 작가의 생각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인 사실을 잊으려 함께 끈을 엮어 부비고 살지만 철저히 개인 별개다 그 속에 고독이 있다. 란 사유를 이끌어 낸 수필 한 편입니다. 하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소재, 역시 쓰기도 이해하기도 녹녹치 않은 어려운 글임을 솔직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벌새 크리킨디 이야기>

      이 글은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역시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죠. 산불을 끄려는 벌새의 무모한 행동.

      작가는 다시 앞 문단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로 독자를 돌려 세웁니다. 과거에 있었던 남편의 병수발이야기 입니다병고에 시달리는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비이성적이건 이성적이건 그걸 따지는 행위는 당시 작가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죠. 자신이 이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을 겁니다. 이 글은 행위 그 내면의 본질, , 사랑하는 타자(남편)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그린 작품입니다. 행위는 결과적으로 존재를 증명하죠. 아무것도 안 할 때 존재감을 상실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볼 때나, 생명을 붙들고 사경을 헤매는 가족이 눈앞에 있을 때 괴로움은 병자와 산자 모두의 것이죠. 몸이 성하다고 산자의 고통을 당연시 하거나 무시하는 현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작가의 고통은 아무 거라도 해야 하는 행위, 그것이 없으면 생명의 가장 큰 가치인 존재를 상실하죠. 자신의 의미가 사라지죠. 작가는 그 몸부림, 내면적인 처절함,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합니다. 자신을 위한 마지막 연민이 어쩜 환자를 통해 환자를 향한 사랑의 몸짓으로 하나가 되는 현상입니다. 어쩜 존재는 별개지만 하나의 현상에 몰입하는 순간 일체인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는데 결국 사랑은 나와 너의 하나 됨이 아닐까요.

       작가는 힘든 상황을 냉철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격정적으로 표현하지도 않고 색을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장면을 연출하고 있네요. 일종의 연필화처럼 차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어쩜 그 내면의 슬픔을 역설적으로 더 슬프게 보여주는 작법일 수도 있습니다. 흑백사진이 더 아련하듯이.

       마지막 문단에서 작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던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했네요. 어쩜 혼신을 다해 할 일을 했던 행위 그 자체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으니까요. 사랑은 생명 본질에 대한 자신의 헌신이자 자신의 버림입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다시 존재라는 가치를 획득하죠.  하지만 글은 결코 다시가고 싶지 않은 내면을 드러 내고도 있습니다. 작가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립다거나 되돌아 가고 싶다거나 하는 표현은 결코 쓰지 않은 이유지요.

      이렇듯 작가의 표현을 들여다 보면 그 속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내야 작품을 잘 이해 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독자도 할일이 분명히 있는 겁니다.

     

       자 이제 두 작품을 읽었습니다. 두 작품의 차이는 하나는 조금 길고 하나는 짧죠. 또 하나는 소재를 손에 들고 정면승부를 건 느낌이 있고 하나는 문체가 냉혹하리만치 담담하여 거리를 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이미지 구축에는 성공했습니다. 어떤 장면이건 그림이 그려지죠. 물론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입니다. 우린 그 그림 속 이야기를 읽으면 되는 거구요.

       작품에서 이미지 구축은 무척 중요한데 이미지는 부분적인 것과 전체를 읽고 느껴지는 통합적 이미지가 있죠. 이는 그림에서도 마찬가진데 이미지는 글에서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 지는 이미지는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 깊고 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화를 동원한 어린이용 학습자료가 좋은 예이죠좋은 작가는 이미지를 잘 구축한다. 이 점은 확실합니다. 기억은 이미지를 기억하지 단어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교장선생님 훈화가 생각나지 않고 금테안경과 배불뚝이 모습이 세월이 흘러 남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죠. 두 작가는 이런 면을 일찍 알고 계신 듯 이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그런데 두 작품 독자(일반독자)입장에서 보면 조금 한계가 드러납니다. <고독의 조건>은 난해한 주제가 쉽게 와 닿지 않는 면이 있어 재차 읽게 되고, <벌새 크리킨디 이야기>는 담백한 표현으로 인해 가슴 속의 응어리, 행위의 본질을 좀 더 강렬하게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저만의 냉철한 평가입니다. 결국 글은 표현 양식에서 장점과 단점이 모두 내재하는 것이지 완전한 답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내공과 수련을 거친 작가도 결국 수많은 작품 중에 한 두 편의 역작으로 후세에 남는 이유가 여기 있음을 봅니다. 글을 가지고 밤잠을 설치고 수많은 퇴고를 거치며 자신의 글에 취하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을 찾으려고 애쓰는 이유이기도 하죠.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부족하지만  순전히 독자입장에서 돈키호테식으로 책을 읽고 난 느낌을 적어보았습니다.

        정말 주제넘은 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족 : 책 한권에 어머니의 글(박경주) 외할아버지의 글(박규환) 그리고 본인 수필집 안내(이종화)가 나온  책은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글 가족, 부럽습니다.

 

                   

 

출처 :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문학
글쓴이 : 김형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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