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좋을 듯 싶어

[스크랩] 마경덕 시인의 시

칡뫼 2016. 4. 26. 13:17

마경덕시인


1954년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신인상 수상
시집  『신발론』, 『글러브중독자』
현재 블로그 ‘내 영혼의 깊은 곳(blog.naver.com/gulsame)’ 운영.
   

 

우물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란 영혼들, 맹물처럼 말라 날아가 버린, 그것들은 대개 일회용이다. 나는 쉰밥처럼 변해버린 가벼운 영혼에 대해 속눈썹이 떨리도록 생각해본 적은 없다.

 

  찌르고 들쑤시고 사막처럼 메마르게 할지라도, 젖은 영혼을 사랑한다. 상처 많은 이 우물에서 詩를 꺼내고 밥을 꺼낸다. 두레박이 첨벙 떨어지는, 서늘히 두렵고 캄캄한 우물. 내 머리칼이 쉬이 자라는 것도 질척한 슬픔에 뿌리가 닿아있기 때문이다. 눈물이 다만 슬픔만으로 오지 않는 걸 이제는 안다.

 



문  


  봉창을 밀고 단숨에 들판이 들어섭니다 뒷산에 우거진 상수리, 툭툭
지붕으로 던지며 뒷간 환기창에 따가운 가을볕 쳐들어옵니다 문이
한나절 나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언젠가 서해(西海)에 가서도 꽁꽁
묶인 적 있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어먹고 사라질 때까지
서쪽으로 난 쪽문에 고요히 묶여 있었지요 아득한 지평선이, 너른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아직 모릅니다



 

우리는 사막을 건너간다



  일렬로 앉아 집으로 간다 땅굴 지나 다리 건너 붉은 십자가 밑 지나간다. 비석처럼 늘어선 도시의 십자가,

거대한 묘지를 떼 지어 지나간다. 종일 도시의 사막을 떠돌던 무리들, 신문을 덮고 귀마저 닫고 목하 기도 중.

손잡이에 매달렸던 전갈을 닮은 사내는 어느 사막으로 떠났을까.

지팡이 하나로 더듬더듬 세상을 헤매는 저 맹인, 캄캄한 사막에서 수없이 모세의 지팡이를 생각했으리.

뒤따라 온 아이는 때 절은 쪽지와 껌 한 통을 무릎마다 놓고 간다

우린 지금 눈을 감고 회개 중, 전철이라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가며.

 

 


빈집

 

 

마당에 깔린 그늘이 한 자루다

마루 밑에 웅크린 어둠은 몇 가마니의 무게로 늙었다

 

먼지 낀 시간위에 됫박으로 씨를 뿌린 잡초들

이곳에서 적막은 거름으로 쓰인다

 

뒷목이 서늘한 추녀 끝

그늘에 묶인 씨종자들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단단한 고요의 매듭에 피가 마른다

 

겨울의 발톱이 빠지고 뒤꼍에 잔풀이 돋아도

사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았다

 

눈이 침침한 대추나무

절구통 밑으로 굴러간 묵은 대추 몇 알 더듬는 봄날 

 

장대를 휘두르며 빈집을 다녀간

바람의 성대만 늙지 않았다



물의 표정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가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저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캄캄한 물의 위장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누적된 그것들을 감추고 평온한 호수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하다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의 목숨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날아라 풍선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묶는다.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오르는 새털처럼 가벼운 풍선들.

절정에 닿는 순간 팡, 허공에서 한 생애가 타버릴,

무채색의 가벼운 영혼이 끈에 묶여 파닥인다.

평생 바람으로 떠돌던 노인의 영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있다.
함성이 왁자한 운동장, 공기주머니 빵빵한 오색풍선들, 첫 비행에 나선 수백 마리

새떼 하늘로 흩어진다. 뼈를 묻으러 공중으로 올라간다.

 

 

벽시계

 

벽에 목을 걸고 살던

그가 죽었다

벽은 배경이었을 뿐, 뒷덜미를 물고 있던 녹슨 못 하나가

그의 목숨이었던 것

 

생전에 데면데면 바라본 바닥은 그를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시간의 실핏줄까지 환히 꿰더니

정작 벽과의 관계는 풀지 못하고

 

그는 추락했다

드러난 벽의 속살, 뒤편

직사각형 족적 하나가 필생의 흔적이었다

 

바닥은 허공을 받치는 기둥   

조각조각 이어붙인 시간이 바닥으로 흩어지고

심장이 멎으려는 찰나, 시간은 뼈를 맞추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손목으로 옮겨와 태연히 흘러갔다

 

밤낮없이 분류하고 조합했던 하루들

심장을 관통하던 전율과 초를 다투던 치열함은 

벽을 놓치는 순간 사라지고,

 

그가 평생을 섬겨온 시간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묵직한 추를 만져본다

시간이 빠져나간 빈 몸

한 번도 몸 밖으로 나온 적 없는 제 몸이 무덤이다

관처럼 기다란 나무상자가 죽은 몸을 담고 있다

 

 


짐승들 이야기



그 모피공장엔 짐승들이 우글거렸네 사람인 척 하는 짐승 같은 사람과 짐승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들과 죽은 짐승들의 눈이 쌓인 모피창고가 있었네.

숨쉬기조차 힘들게 날아오르는 짐승의 털도 가난을 밀어내지 못하고 배고픈 짐승들,

 배부른 짐승의 하룻밤 술값 정도에 금세 길들여졌네. 숱한 밤이 뜬 눈으로 들들들,

미싱에 박혀죽고 먼지 쌓인 바닥에서 죽은 짐승들의 물 먹인 껍데기는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졌네.

여우 한 마리 팔딱, 재주 넘어 열 마리 여우로 둔갑했네.

 수입산 백여우 뱃가죽을 칼로 찢으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짐승들,

늘어난 가죽에 빗질을 하며 눈부신 빛을 달고 살았네.

죽어서 더 빛이 나는 껍데기에 밤새 날개를 달았네. 그저 일밖에 모르는 미련한 짐승들,

백여우의 탐스러운 꼬리에 손 베이는 줄 몰랐네.

수없이 죽어간 짐승들의 슬픈 눈에 그해 여름, 펄펄 눈이 내리고

 

 


슬픔을 버리다



나는 중독자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네 이름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공인된 마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 앞을 서성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오면
목덜미로 빗물이 흘렀다
전봇대를 껴안고 소리치면
빗소리가 나를 지워버렸다
늘 있었고 어디에도 없는, 너를 만지다가
아득한 슬픔에 털썩, 무릎을 꿇기도 했다
밤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너에게 감염된 그때, 스무 살이었고
한 묶음의 편지를 찢었고
버릴 데 없는 슬픔을
내 몸에 버리기도 하였다

 

출처 :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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