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번호 257번
김 형 구
멋모르고 저지른 죄였다. 가슴이 답답할 때 글을 썼다. 그냥 가지고 있어야할 글을 이 동네 저 동네 뿌린 게 화근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체포되어 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맞춤법을 어기고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 거기에 수준 낮은 사유와 자기 자랑 투의 어법, 세상고민은 혼자 다 한 듯한 넋두리 등. 죄목이 수두룩했다. 현행범이라 영장도 없었다.
이상한 감옥이었다. 육체적 구속은 물론 정해진 형량도 없었다. 자율이란 크고 높은 벽이 둘러져 있을 뿐. 수감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선지 감옥 생활을 즐긴다고나 할까. 행복해보였다. 그런데도 누구나 출소를 염원했다. 출소란 글로 세상을 주유하는 것이었다. 결국 어느 수준의 글 실력이 필요했는데 타인의 혹독한 평가와 냉정한 자기검열이 따랐다. 들어오긴 쉬어도 나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감옥생활은 생각보다 자유로웠다. 사회적응을 위해 글을 써내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안한다고 뭐라는 사람은 없었다. 살아 온 이야기를 반성문처럼 쓰거나 주변의 일을 적당히 기록하며 지냈다. 실은 그게 문제였다. 세상 일이 그러하듯 대충하다 보니 글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만큼 형기가 늘어났는데 이것이 무서운 벌이었다.
빠른 출소를 위해 수감자들은 일주일 혹은 한두 달에 한 번 모여 그동안 쓴 글을 서로 평가했다. 글 기본이 되어있지 않으면 면박을 받거나 싸늘한 시선을 감내해야했다. 미소 띤 얼굴에 예의를 갖춰 점잖게 지적하지만 평가는 냉혹했다.
고치고 또 고쳐 썼다. 구성을 바꾸기도 하고 수식어, 조사, 부사, 맞춤법에 띄어쓰기까지. 200번은 넘지 싶었다. 그 덕인지 그리 나쁜 평가를 받진 않았다. 몇 차례나 고쳤냐는 말에 언 듯 257번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 일로 나는 ‘이오칠’이란 별명을 얻었다. 별명은 '열심'이라는 의미로 다가왔고 싫지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 257번 수인이 되었다.
글 감옥은 거대해서 다른 곳에도 수감자들이 많았다. 우리 ‘수필’동 근처에 ‘시’동이 있는데 그곳 수감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긴 수염에 꽁지머리를 한 그는 주로 독방에 갇혀 있었는데 대화나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지 그의 시는 선문답처럼 어려웠다. 우리 뒤쪽에 있는 ‘소설’동에는 주로 어설픈 거짓말 때문에 갇힌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모든 것이 자율이었지만 글을 심사하는 곳이 있었다. 공개심사를 통과하면 감옥에서 출간하는 정기간행물에 글이 실리곤 했다. 하지만 출소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었다. 공개강좌도 여러 군데 있었는데 험난한 글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쳤다. 선생님은 대부분 글로 자기세계를 구축한 분들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끔 자신의 글이 주례사 같은 평론이나 인사성 칭찬을 들으면 들떠서 출소를 기다리느니 탈옥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다시 잠잠해졌다. 그 정도 실력으론 나간다 해도 인정받고 살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답답했다. 이곳을 나가기가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방법이 있긴 있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나에게 밥만 먹고 살라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실력이라도 뛰어나야 할 텐데 그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출소한 분이 면회를 왔다. 출소한 사실만으로도 존경받는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밖은 더 큰 감옥이야. 날개 없인 살기 힘든 곳이지.”
“날개라니요?”
“생각에 날개를 달 수 있어야해.”
점점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짧은 시간에 쫒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날개는 어떻게 달죠?”
“많이 읽고 많이 써야지. 끝없이 사색하고. 자신만의 세상 보는 눈을 키워야 해. 그 다음 갈고 닦은 글 솜씨로 날개를 다는 거야.”
난 그날 이후 글이 칭찬받는 날이면 꿈결처럼 몸이 둥둥 떠올랐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솟아 하늘을 나는 느낌이었다. 속 비치는 날개를 달고 바람처럼 나는 잠자리나 고운 꽃가루를 묻히고 화려한 날갯짓을 하는 나비가 이런 기분일까. 튼튼한 날개에 예리한 눈을 가지고 높이 나는 독수리야말로 이런 기분일거야. 그래, 날개를 달고 훨훨 높은 담장을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는 거야.
책상 위에는 밤새도록 쓰고 지운 A4용지가 여러 장 쌓여 있었다. 이중 삼중으로 고치고 써넣은 빨간 글씨. 검정 펜으로 다시 덧 댄 메모. 볼펜. 어질러진 안경과 커피 잔. 프린터에는 인쇄된 종이가 매 맞은 개구리 혓바닥처럼 나와 있었다. 잠에서 깬 나는 마우스를 클릭했다. 잠자던 모니터가 환해지더니 ‘오전 02:10’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는 애벌레처럼 누워있는 글자들 사이에 죽비처럼 생긴 막대커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졸린 눈을 부비고 본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 257번 수인은 오늘도 탈옥을 꿈꾼다.’
2014년 <에세이문학 여름호>
제 글에 대한 비평-
역설, 옥獄에서 해탈을 꿈꾸다
- 김형구의 <수인번호 257번>
남정언
갇힌 공간, 감옥에서 영원한 해탈을 꿈꾼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공권력에 의해 감옥에 갇힌 자들은 형을 살고 만기 출소를 바라거나 탈옥을 꿈꾼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감옥에 들어가는 이유는 죄에 대해 대가를 받기 위함이다. 해탈의 경지, 절대 고독을 누리려고 갇히는 건 아니다.
일상적 세계의 차원에서 모순되는 진리가 높은 차원의 세계로 의미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화자의 숙명과 만난다.
멋모르고 저지른 죄였다. 가슴이 답답할 때 글을 썼다.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할 글을 이 동네 저 동네 뿌린 게 화근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체포되어 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전문적이든 아마추어적이든 글을 쓰는 사람, 즉 작가는 스스로 들어가 앉은 ‘글 감옥’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글의 감옥으로 은유 되는 세계, 절대 고독이 작가 자신을 옥죄었지만, 그 고독을 이겨낸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작가는 다산, 초의, 추사 등의 거장들이 절대적 고독의 시간을 견뎌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가로 성장했던 밑바탕을 알기에 스스로 갇히고 얽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고행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려 한다.
‘자율의 벽’을 넘어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독자와 작가와의 관계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글을 쓰지만,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또한 역설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독자는 작가 정신으로 무장하고 독자를 일깨울 수 있는 선각자적 존재를 원하고 있을 터이다.
작가 김형구는 경기도 김포 갈산리葛山里가 고향이다. 현재 그곳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생활인이다. 칡뫼 김구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이며 시인이다. 수필 ⟨색계⟩로 2012년 ⟪에세이문학⟫ 가을호에 초회 추천, ⟨고승을 찾아갔다가 부처님을 만나다⟩로 2013년 ⟪에세이문학⟫ 봄호에 완료 추천되어 활동하고 있다. ⟨수인번호 257번⟩은 2014년 ⟪에세이문학⟫ 여름호에 발표한 글이다.
작가의 블로그 ‘칡뫼’에 가서 보면 작가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생활인으로 큰 빚을 안고 파산한 적도 있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십 년 세월은 고된 인생을 배운 시기였으며 값진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삶의 고단함과 힘겨움을 배설할 목적으로 시작한 시와 수필 쓰기가 얼마나 절실했을 것인가.
작가는 경제적 빚 갚기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시, 그림, 수필 등 문화예술 전반에 시선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전문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 창작에 전념한다. 돈과의 이별을 그린 수필 <사랑하는 당신에게>에서 선언한 것처럼 치열하게 글을 쓰는 작가는 어떤 삶을 사는가.
고치고 또 고쳐 썼다. 구성을 바꾸기도 하고 수식어, 조사, 부사, 맞춤법에 띄어쓰기까지. 200번은 넘지 싶었다. 그 덕인지 그리 나쁜 평가를 받진 않았다. 몇 차례나 고쳤냐는 말에 언 듯 257번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 일로 나는 ‘이오칠’이란 별명을 얻었다. 별명은 '열심'이라는 의미로 다가왔고 싫지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 257번 수인이 되었다.
작가는 제대로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안고 글을 쓴다. 처절하리만치 쓰고 고치기를 반복한다. 헤밍웨이가 10만 단어를 버리고 다시 쓰기를 이백 번 정도 했다는 「노인과 바다」에 견줄만한 ‘257번’의 퇴고 과정을 거쳤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첫인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집필했으나 출판사로부터 출간을 거절당하며 17년 동안 개작하여 ⟪오만과 편견⟫을 내놓은 제인 오스틴, 아날로그 방식인 원고지에 손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면서 조사 ‘은’을 쓸까, ‘는’을 쓸까 고민했다는 김훈 작가, 진달래꽃을 발표하고도 고치기를 계속하여 다시 발표했다는 김소월 시인의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한 편의 글을 쓰기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쓰기 전 단계에서부터 쓰고 난 후 퇴고하는 과정의 시간까지 작가만이 품어야 하는 절대적 고뇌의 시간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 시간과 더불어 작가는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받아들인다. 인간만이 가진 도구인 언어, 그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완전히 몸에 익혀야 한다. 산골에 칩거한 채 집필 활동을 하는 마루야마 겐지의 말처럼 감탄할 만한 문장을 내면에서 길어 올리기 위해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감옥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이규보의 한시 시벽詩癖에는 밤낮을 자지 않고 시에 빠져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규보는 시를 쓰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버릇. 시 쓰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시마詩魔가 붙었기 때문이라며 창작의 괴로움을 말한다. 하지만 창작의 괴로움만 있겠는가.
난 그날 이후 글이 칭찬받는 날이면 꿈결처럼 몸이 둥둥 떠올랐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솟아 하늘을 나는 느낌이었다. 속 비치는 날개를 달고 바람처럼 나는 잠자리나 고운 꽃가루를 묻히고 화려한 날갯짓을 하는 나비가 이런 기분일까. 튼튼한 날개에 예리한 눈을 가지고 높이 나는 독수리야말로 이런 기분일 거야. 그래, 날개를 달고 훨훨 높은 담장을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는 거야.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희열과 잠시지만 벗어나는 자유를 맛본다. ‘감옥’과 ‘탈옥’ 그리고 ‘벗어남의 자유를 만끽하는’ 영화 ⟨파피용⟩과 ⟨쇼생크 탈출⟩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란 글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자유를 얻기 위한 탈출의 처절함은 영화의 주인공과 사뭇 다르다. 탈옥에 성공해도 다시 옥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글 감옥은 수필동과 더불어 시동 소설동의 수인들로 항상 붐빈다. 수필동 수인의 모습은 독방에 있으면서 수필 성격상 감옥의 간수와 감옥 밖의 사람들과 소통도 해야 하고, 진실한 자세로 수형 생활을 잘 견뎌야 한다. 그래서 시동이나 소설동의 수인보다 ‘자신을 지켜내기’가 더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이겨내어야 한다.
작품에서 화자는 ‘257번’이라는 집념으로 퇴고한다. 인내의 과정을 통과하여 글이 발표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새벽에 잠들었을 수많은 날을 헤아려 본다. 다만 멋진 형상화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다듬어졌어야 할 문장에 모호함이 조금 남아 있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에 있어 257번이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맞춤법을 어기고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 거기에 수준 낮은 사유와 자기 자랑 투의 어법, 세상 고민은 혼자 다 한듯한 넋두리 등. 죄목이 수두룩했다.
죄목을 나열해 보면 ‘맞춤법을 어기고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 거기에 수준 낮은 사유를 펼친 죄, 자기 자랑 투의 어법을 남용한 죄, 세상 고민은 혼자 다 한 듯한 넋두리를 늘어놓은 죄 등. 죄목이 수두룩했다.’를 ‘맞춤법을 어김,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음. 거기에 수준 낮은 사유하기, 자기 자랑 투 같은 어법의 사용, 세상 고민은 혼자 다 한 듯한 넋두리 늘어놓기 등 죄목이 수두룩했다.’라고 한 문장에 하나의 내용만 넣어야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가끔 자신의 글이 주례사 같은 평론이나 인사성 칭찬을 들으면 들떠서 출소를 기다리느니 탈옥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이나’로 문장을 이어가면 앞과 뒤가 대등하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주례사 같은 평론’을 마주하고 ‘○○○과 같은 인사성 칭찬’을 들으면 같이 글을 마무리해야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의 제목을 ‘수인번호 257’까지만 적겠다. 번호에 번이 들어가 있어 중첩되어 제목에서만큼은 빼는 것이 나을 것이다. 퇴고하기를 꺼리지 않는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몇 개의 문장 오류들은 감옥 생활을 통해 가까운 시일 내 고쳐질 것이라 믿는다.
자기검열에 ‘열심’인 수인번호 257번으로 살아가는 작가에게 희망한다.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다. 작가는 시·서·화를 아우르는 진실하고 겸허한 수필 세계를 만들어 해탈하기 바란다. 아울러 수필을 공부하는 우리도 생각의 날개를 달아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아픔을 치유하여 괴로움을 벗어버리고 창작의 열반涅槃에 드는 독수리가 되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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