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往十里) / 김 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시 왕십리(往十里)를 다시 읽고--- / 칡뫼
그 전에는 이 시를 그저 서정시 한편으로 알면서 읽고 비가 오는 장마철이면 하기 좋은 말로 농 삼아 읊조렸었다.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하면서 읊조리면 듣고 있던 어머니께서는 끔직한 얘기 하지 말라 하셨다.
그런데 다시 읽게 된 이 시가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수험생이었던 아들의 시 해설서를 보면 슬픔 회한 "ㄴ"자의 연속 등 장황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시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모습은 나의 학창시절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 자신 "예술은 보는 자의 것이다." 라는 명제를 무기삼아 나름대로 편히 음미하며 읽어 보았다. 한 단어 한 행 천천히 읽어 내려가니 가슴이 먹먹한 것이 슬픔 , 회한, 체념 속에 그래도 놓아서는 안 되는 마지막 희망의 끈, 미련이 함축된 아름다운 시로 와 닿으며 눈물이 나고 말았다.
이 시는 1923년 잡지 신세계에 실은 시로 알려져 있으니 때가 나라 잃은 지 십여 년이 흐른 '일제시대' 암울한 시기에 써진 시로 추정된다. 그러니 시인의 여린 감성 가슴 저 밑바닥에는 나라 잃은 깊은 슬픔이 깔려있다 해야겠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그래 그 정도 왔으면 됐지 얼마나 더 오려고 그러니 끝도 없냐? 긴 긴 장마도 여드레 스무 날에 와서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 했거늘.
첫째 연과 둘째 연에서 시인은 체념 속에 넋두리를 하고 있다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온다--
왕십리 이는 한 동네의 지명일 수도 있으나 난 "갈 왕(往)자가 들어간 지명 "에 밑줄을 긋고 싶다 그러니 '갈 때가 됐다'란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모든 슬픔 내지는 일제의 압박, 이 모든 것 갈 때가 된 게 아니냐는 뜻이 아닐까 ? 그런데 가도 가도 비가 온다고 슬퍼하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암담한 현실이냐 합방된 지 십 수 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나라의 독립 해방은 요원한 현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애절하다 답답하다 슬픔에 또 슬픔을 얹어놓은 새 울음 , 제발 이러지 말라는 시인의 절절함이 깊고 깊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벌새 자그맣고 애절해 보이는 새, 힘들어 하는 소시민, 아니 우리 백성의 모습이 아닐까?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 늘어졌다네-
이는 지치고 힘든 우리 조선인의 상징이다.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진 마음의 상징이 실버들로 표현되고 비에 젖어 늘어진 것으로 보면 더 슬프다.
비가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다시 한 번 더 쓴 말, 이리 길고 지루한 장마 넌더리 난다로 봐야하겠다 .즉 해방은 언제 쯤 이냐 해 나고 밝은 날은 언제 쯤 일까에 대한 반어로 봐야겠다.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마지막 연은 어쩌지 못하는 시인의 속내 아닐까. 구름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속절없는 자신, 그것도 흘러가지 못하고 산마루에 걸려있다고 읊었다 . 현실이다. 시인 자신 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였을 거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이 시를 이 여름에 다시 읽으니 과거 나 자신 앞길이 안 보여 답답했던 힘든 시절과 겹쳐 보이며 나를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가정을 책임졌던 가장의 좌절도 이리 힘들었는데 나라 잃고 암담한 현실에서 시인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로 정제되어 나타냈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시인의 마음은 내리는 비만큼 이나 축축하고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섣부른 지식과 감정의 골이 얕아 과연 작가의 그 깊은 속울음이나 감동을 얼마나 읽어 냈을까마는 그래도 이 시가 깊이 내 가슴에 와 닿으며 울컥 눈물이 나는 건 아마 세월의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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