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을 오르다 보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뻐꾹뻐꾹 소리를 듣게 된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여지없이 입하 소만 시절이다.
뻐꾸기 소리는 늘 슬프다. 그래서일까
이 새소리만큼 인간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자연의 소리도 없지 싶다.
가난이 본질인양 살았던 농부나 아낙네에게는 슬픔의 소리요
자신의 설움을 대입하기 좋은 이야기 소재였다. 수 많은 전설이 있다.
농경사회의 산물이 늘 그러했듯 못된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가 주인공이다
이야기는 슬퍼서 생략한다.
쌀 모양을 품은 꽃며느리밥풀꽃 전설이
이미지를 통한 해우였다면
뻐꾸기 소리는 음색으로 풀어낸 사연이 아니었을까.
또한 씨 뿌리는 계절에 우니 농부에게는 포곡(布穀)으로 들리고
나라를 잃은 이에게는 복국(復國)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동물세계를 보면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맨입으로 새끼를 기르는 폭군같은 새이다.
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뻐꾸기 소리는
깨어나 자라면서 배다른 형제를 다 밀어내 죽이고 혼자 살아남은 뻐꾸기 새끼에게
‘나 여기 있다 내가 니 에미’다 하는 존재증명이요.
소리 학습효과란다. 인간의 눈으론 기기 찰 노릇이다.
하지만 짧은 여름 멀고 먼 길 날아와 지친 몸 둥지 틀 여유 없이 남의 집에 새끼를 치고
함께 떠나야하는 뻐꾸기 입장에선 그 조바심이 얼마일까.
슬프고 서러워 피 끓는 울음을 울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론이 길었다. 이 복잡한 인간세계
우리는 홀로 이루어 내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우린 누구나 뻐꾸기인 것이다.
격하게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다. 그래서 슬프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는 숲에선
지금 종처럼 달렸던 때죽나무 꽃이 지고 있고 산딸나무가 피어나고 땅비싸리도 한창이다
늘씬한 오리새 풀도 꽃을 피었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오리새
산딸나무